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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거리만능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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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미국 독립전쟁의 철학적 기반 중 하나였다. 1760년대 영국 정부가 식민지 미국에 대해 각종 세금을 물리자 식민지에선 본국 정부의 일방적인 과세라며 반발했고, 1773년엔 보스턴 시민들이 항구에 정박한 동인도회사의 차(茶)를 실은 선박을 습격하는 차 폭동 사건까지 벌어지며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에서 정부의 세제개편안을 민심을 무시한 ‘세금폭탄’으로 비판하며 인용한 역사적 사례다.

 2013년 대한민국에선 물론 ‘대표 없이 과세 없다’의 시스템이 완비돼 있다. 국민이 뽑은 대표(의원)들이 국회에 있고 세법을 다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엔 공평하게도 새누리당 13명 대 야당 13명으로 여야가 정확히 동수다. 야당이 반대하는 한 정부·여당이 용 빼는 재주를 부려도 세제개편안을 처리할 수 없다는 의미다.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직권상정하는 방법이 과거엔 있었지만 국회 선진화법이 도입되며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세금 투쟁을 거리로 확대한 이유가 뭔지 궁금해진다. 어차피 세법은 국회에서 만들어야 하고, 민주당이 반대하는 한 정부안은 통과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지난 11일 거리서명운동을 시작하겠다고 공언했고 12일엔 직장인들이 움직이는 점심시간 여의도에서 서명운동을 했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안의 원점 재검토를 지시했지만 민주당은 13일엔 ‘국민저항운동’을 중단한 건 아니라며 정부의 수정안을 보고 서명운동 지속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장외투쟁 중인 민주당 입장에선 세금 논란만큼 호재는 없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세금폭탄에 찬성한 이들은 찾기 어렵다. 동양에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있다면 서양엔 “죽음과 세금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벤저민 프랭클린)는 격언도 있다. 그러니 여론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장외투쟁의 동력을 얻는 정치적 의도에선 서명운동이 200%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당이 아니어도 가두서명에 나설 민간단체는 많다. 반면 국회에서 새누리당과 머리를 맞댄 채 돈은 부족한데 할 일은 많으니 얼마나 필요하고 누구에게서 더 걷을지를 치열하게 논쟁할 쪽은 민주당 등 야당뿐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본업은 거리에서 벌이는 서명운동이 아니라 국회에서 만들 세법개정안에 있다. 물론 민주당은 당 정책위에서 나름의 세제안을 마련 중이다. 그럼에도 다른 한쪽에선 길거리 저항에 대한 끈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으니 부업과 본업을 착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과세는 집단과 계층의 이해가 정면 충돌하는 제로섬 게임인 데다 정서까지 건드리니 거리에서 해법을 찾기엔 곤란한 사안이다. 오히려 거리에서 결정하면 포퓰리즘이 된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격언은 민주당이 세금 논쟁을 전개할 자리가 국회임을 뜻하기도 한다. 민주당이 ‘거리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