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장 길었던 3일 (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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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대 국회의 이충환 의원 (당시 충북 진천·무소속·현 신민당 정무위원·53)은 6월 25일 상오 10시쯤 청주에서 「라디오」를 통해 38선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마 전면전쟁이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신분이 국회의원이라 빨리 서울로 가야하겠다고 이날 하오 1시의 경부간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북상 도중 조치원에서 이형근 준장 (당시 제2사단장 <사단cp 대전>·현 행정개혁조사위장·50)이 지휘하는 대대병력을 가득 태운 열차를 보고. 『정말 전쟁이 났구나』생각했다.
이 의원은 그곳에서 이 사단장과 만나 잠시 전세에 관해 물어 보았는데 『격퇴할 수 있겠지요』 라는 대답을 듣고 흐뭇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2사단장은 격퇴자신>
제헌국회 다음의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l950년 5월 30일에 실시됐다. 이 때의 선거관리 장관은 백성욱내무 (현 소사에서 백성농장 경영·73)였다.
『김효석 (2대 내무·납북) 다음에 내가 내무가 됐는데 솔직히 말해서 5·30 선거에서 내각 책임제라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어. 다른 사람은 정치적으로 걸리는 게 많다는 거야. 그래 내가 그 선거를 치렀는데 소위 입후보자들이 나를 찾아와서 별별 요구가 많았지. 아직도 이야기 못 할 것이 많아요.』
제헌국회에서도 파란은 많았다. 그 중 으뜸가는 것이 국회 안의 공산당 「프락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의 시경 국장 김태선씨 (현 경우회장·67) 와 오제도 검사 (현 변호사·53)가 파헤친 것으로, 남로당 (주=남한의 박헌영 계열의 공산당) 의 이삼혁이가 제헌 국회 안에 일종의 「거점」을 확보, 소위 외군 철수안을 가결시키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걸려든 것이 부의장 김약수, 의원 노일환·이문원·박윤식·김병회·황윤호·서용길·강욱중·이귀수·김옥주·권중혁·최태규 등 이었다.
이들은 국회에 대한 공작의 중심으로 외군 철퇴안을 상정 통과시키려 했으나 국회안 정세가 불가능하게 되자 연판운동을 개시하여 되자 감언이설로 62명의 찬동 서명을 받아 「유엔」 한위에 이 진언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주=이 사건 관련자는 일망타진되어 최하 2년 최고 12년형을 받았다)
제헌국회가 이렇게 된서리를 맞았지만 5·30선거를 통해 선출된 2대 국회의원 면모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백화제방의 2대 국회>
참고로 2대 국회의 원내세력 분포를 보면 ▲무소속 1백 26 ▲대한국민당 24 ▲민주 국민당 24 ▲국민회 14 ▲대한청년단 10 ▲대한노총 3 ▲사회당 2 ▲일민구락부 3 ▲기타 4로 계 2백 10명이었다. 이중에는 제헌국회의 선거때 소위 『남한 단독선거』라고 출마를 포기했다가 사태가 굳어지자 다시 나온 거물 정객도 더러 있었다. 어쨌든 제헌국회의원 (영월 출신)으로 있다가 6·25당시에는 체신장관이었던 장기영씨는 『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보고 부산의 정치파동을 예견했다』 (후기) 고 말할 정도로 2대 국회의원들도 이승만 행정부의 고분고분한 『시녀』만은 아니었다.
참고로 2대 국회의원 2백 10명 중 굵직굵직한 소위 『반골 의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원세훈(서울 중구 갑·민주연맹) ▲박석천(서울 종로 갑·대한부인회) ▲오하영(종로 을·무) ▲지청천(성동 갑·민주국민당) ▲윤기섭(서대문 을·무) ▲조소앙(성북·사회당) ▲곽상열(인천 을·무) ▲조봉암(인천 병·국민당) ▲신익희(경기 광주·민주국민당) ▲안재홍(경기 평택·무) ▲이재형(경기 시흥·국민당) ▲백상규(경기 장단·무) ▲임영신(전북 금산·국민회) ▲김용무(전남 무안·민주국민당) ▲서민호(전남 고흥 을·무) ▲장택상(경북 칠곡·무) ▲장건상(부산 을·무) ▲전진한(부산 무·대한노총) ▲오위영(경남 울산 갑·무) ▲김봉재(경남 창원 을·무) ▲신중목(경남 거창·무) ▲태완선(강원 영월·무) ▲윤길중(강원 원주·무) ▲이재학(강원 홍천·대한국민당) (무순).
말하자면 2대 국회야말로 남한의 공산당을 제외한 유명 정객들이 거의 참여한 「백화제방」 과 「백가쟁명」의 입법기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제 2대 국회의 배경은 그만 살피고 이충환 의원을 비롯한 몇몇 생존 의원들의 증언을 계속 들어보자.

<백성욱 내무 전황보고>
『이튿날인 26일에 국회가 소집되었는데 우선 채병덕 참모총장과 백성욱 내무장관으로부터 전황보고를 들었어요.
그 다음에 이날 회의에서는 「국회는 예산에 구애됨이 없이 군사비 지출을 위해 정부에 대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그날 하오 1시에 끝난 것 같아요. 군사비의 무제한 지출에 대해서는 백상규 의원 (경기 장단·무·납북) 엄상섭 (전남 광양·무) 이진수(경기 양주 을·국민회) 의원이 주로 발언을 했습니다.』
▲여운홍씨 (당시 경기 양평·현 공화당 고문·79) 『26일에 중앙청에서 임시국회를 소집했는데 채병덕 참모총장이 지도를 여러장 갖고 와서 전황이 좋은 듯이 설명했어. 그날 밤 백상규의원 집에 몇몇이 모여 저녁을 먹는데 북괴 「야크」 비행기가 기총소사를 하는 바람에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왔지.』
▲윤길중씨 (당시 강원 원주·현 신민당 정무위원·54) 『5·30 선거로 구성된 2대 국회는 6윌 20일에 처음 개회를 했지만, 25일까지 정·부의장 선출만 끝냈을 뿐 상임 분과위원장 선거도 끝내지 못했어요 (주=의장 신익희·부의장 조봉암·장택상). 의원들끼리 서로 얼굴도 모르고 있었지요. 25일 낮에 나는 동자동 내 집에 놀러온 박승관씨 (당시 전남 경찰국장) 와 차윤홍씨 (당시 국회 사무처 의사국장) 와 함께 만담을 하며 놀고 있었지요. 저녁에 38선 근처의 분쟁소식과 국군의 비상소집 소식을 듣고는 그들도 급히 자리를 뜨더군요. 나는 처음에는 또 전에 있었던 것 같은 충돌정도로 생각했어요.』
▲김용우씨 (당시 서대문 갑·현 「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58) 『전쟁이 터진 것을 안 것은 정부의 보도관제 조치 때문에 25일 상오 10시가 넘어서였습니다. (주=보도관제는 없었고 군 관계기사는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에서 일괄 보도했음).
26일 국회가 열렸지만 채병덕 장군이 와서 「사흘 안으로 평양을 함락시키겠다」고 호언했어요.』 2대 국회의원들이 6·25가 터졌을 때 일요일인 탓도 있겠지만 그 날을 엉거주춤하고 그대로 넘긴 것만은 틀림없다.
27일자의 조선일보는 그 때의 국회동정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침공지 주민에 위문단>
『국회는 26일 상오 11시에서부터 신익희 의장 사회로 제1차 본회의 (주=6월 20일에 개회)를 열고 비상시국에 관한 결의안을 상정, 「유엔」 및 미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작성, 통과시켰다. 그리고 아군경 및 38선 지역에서 적의 침공을 방어하고 있는 당지 주민에게 보내는 격려문을 통과시키고 동 지구에 대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격려 위문단 파견을 결의했다.
또한 정부에 보내는 긴급 군사비 지출 결의안을 가결하고 종합적인 전황 및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이 대통령과 관계 장관을 출석시킬 것을 결의하고 이어 곧 비밀회의로 들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26일 밤, 거의 정부의 비상국무회의와 때를 같이하여 열린 국회의 「서울사수결의」회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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