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의 생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최현배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분의 호는「외솔」이다. 한글 학자들의 호가 첫마디에 「외」니「한」니「ㅡ」로 시작되는 것은 우연인지 모르겠다.「한흰샘」(주시경),「한결」 (김윤경),「일석」(이희승),「외솔」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한글을 닦아온 길을 생각하면 정말「외솔」같다. 준령의 고송처럼 그렇게 역경과 시련의 길이었다.
『제나라 말이 없는 나라는 반쪽밖에 없는 나라이다.』「외솔」은「아일란드」의 정치인 「패트릭·피어스」의 말을 언제나 일깨웠다. 10세기쯤「아일랜드」는「노르망디」의 침략으로「에이레」어를 몽땅 잃어 버렸었다.
필생의 역저인『우리말본』은「외솔」이 약관의 청년시절에 착수한 것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외솔」이「우리말본」의 원고를 놓고 집을 나갈 때면 부인에게 꼭 이렇게 일렀다. 『만일 집에 불이 나거든, 저 원고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우!』원고의 부피가 차츰 많아지고, 정리가 끝날 무렵엔 뜰 한복판에 독을 묻고 그속에 원고를 간수한 적도 있었다. 이 저서가 햇빛을 본것은 그 10년도 넘은 1935년, 망국의 어둠속에서 였다.
작년에 작고한「한결」은「외솔」의 고희 논문집 서두에서 그의 생애를『굵고 길게 산 귀한 인생』이라고 칭송했다.「한결」은「외솔」의 학문적 신념을『철석같이 굳은 뜻』이라고도 표현했다. 잔일 큰일에 가림 없이「외솔」의 한글에 대한 애정은 고결한 그것이었다.
그는 광복이후 많은 새 낱말들을 지어냈다. 가락국수, 초밥, 덮밥, 우선 멈춤등….『나날의 신문지에 계늑이니, 우범이니,「난센스」니,「스냅」이니,「엘리트」니,「라이벌」이니 무어니 무어니 하는 기괴한 말들이 실리는데도 대체 이따위 말들이 누구에게 쉽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탄하는 논문도 발표한 적이 있다.
언젠가는「라디오·드라머」에서『그녀는 뒷문으로 들여다 보았다』는 대화를 듣고는 몹시 분개했었다. 이런 때에「그녀」인지「그년」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어의 여성 삼인칭을 그는『그미』로 하자고 제안했다. 남성의 경우는『그비』-.「그미」그는 후 중견 작가 P씨에 의해 소설의 대화체로 쓰이고 있다.
최근엔 어느 TV에서 아내가 사랑스러운 남편을『하니』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는『그린비』(그리운 남편?)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편지를 낸 일도 있었다. 남편이 아내를 부를때는 『단미』(달콤한 아내?)로-.
세상에선 이런 일들을「외고집」이라고 핀잔도 주었다. 그러나 학자의 긍지와 지조가 허물어져 가는 세태에서「외솔」은 마지막 선비의 풍모마저 보여 주었다.「외솔」의 슬기와 「철석같은 뜻」은 이제 한글에서나 찾아 볼 수 밖에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