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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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50년경의 해이다. 미국 시찰에서 돌아온 어느 교수에게 미국에서 재미본 얘기를 하라고 청하였더니, 그 귀국인은 한국이 좋더라고 딴말로 내청을 받아 넘겼다. 그에 의하면, 미국에서 교수를 만나보려면 며칠전에 전화로 면회시일을 약속하고 또 만나보면 채 따뜻해지지 못한 자리를 떠나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지나는 길에 친구집에 들러도 주인이 집에 있으면 만나주고 만나면 술상이 나오고 시간가는 줄 모르게 환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미국인이 한국사람보다 인심이 각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활이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지금에는 그런 후한 인심과 따뜻한 정이 없어져가고, 남과 약속할 때는 수첩을 꺼내서 약속시일을 적어 넣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1959년 내가 미국에 들렸을 때, 전의 제자가 내 숙소로 찾아와서 바빠서 진작 못온 것을 미국에서는 약속 때문에 하던 일을 중단하고 시간에 대어 가느라고 바쁘기만 하고 일을 변변히 못한다고 투덜댔다. 사실 일은 마음이 내켰을 때 한숨에 해 치워야 그 일이 쉽게 빨리되는데, 요새는 한국에서도 생활이 바빠져서 일을 중단하든지, 약속을 어기든지 하는 수가 자주 생긴다.
오늘날에는 한국에서도 물질문명이 발달한 서양에서와 같이 생활이 점점 바빠져서 친한 사람과 따뜻한 정을 나누기 어려워져가고 어떤 때는 하던 일도 중단하여 능률을 올리지 못할 때도 있다.
문명의 이기가 발달되면 인력의 노동을 그만큼 감소시켜 생활이 덜 바빠야 할 터인데 사실은 그와 정반대로 그전보다 더 바쁜 것 같다.
지금이 예전 보다 더 바쁜 이유는 시간을 세분하여 그 짧은 동안에 소정의 일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촌음을 아낀다 하였지만 지금에는 초를 다투고 있다.
오늘날의 생활은 바다의 큰 파도가 아니라 산골짜기 개울의 잔물결 같이 바쁘고「마라톤」경주가 아니라 백m 경주같이 분주하고 숨가쁘다. 사람이 정밀기를 사용할 수록 인간은 더 작은 톱니바퀴로 화하여 정신차릴 수 없이 바빠질 것 같기만 하다. 이혜구<서울대 음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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