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망령중인「우·누」와「코이랄라」를 만나고|성야방수<정강신문 논설위원>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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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필자는 작년 11월말「아프리카」를 떠나 인도의「뉴델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는「코이랄라」씨가 석방되어 국왕으로부터 협력해 줄 것을 요청 받았으나 협력의 조건으로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다시 국왕과 충돌하는 바람에 신유의 위험을 느껴 지금은 인도영내에 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인도의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작년까지만 해도「인디라·간디」내각의 계획상으로 있었다.
그러나 인도정부가 소련의 원조를 받고있는 형편때문에 소련의 행동을 강력히 비난할 수 없음을 분개, 국회에서『소련의 행동은「유엔」헌장위반』이라는 것은 분명히 밝히고 그날로 각 요직을 사임한 쾌남아이다. 이 사람은「코이랄라」와도 친교가 있을법 했다.
필자가「아쇼카」씨 저택을 방문했을 때는 마침 인도국민회의파의 분열이 격화되던 때이라서 그런지 저택안에는 방문객의 출입이 뻔질났다.
그러나 그 바쁜 가운데도 그는「메모」를 뒤적여 한 사람의 주소를 찾고는『아무튼 이곳으로 전보를 쳐 보라』고 말했다.

<「코이랄라」찾는데 성공>
수신장소는「파드나」시내였다.「파드나」는「갠지스」강변 도시로서「네팔」의 수도「카트만두」와 가장 가까운 인도도시이다.
그 다음날 밤중「호텔」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상대방이 누군지는 몰라도「코이랄라」씨의 현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파드나」가 아니라「베나레스」에 살고있는 듯하다. 급히 비행기표를 바꾼후 이튿날 아침「베니레스」로 향했다.「베나레스」시의 교외에 있는 가르쳐 준 대로의 번지를 찾아가 보니 그 집은 성처럼 크나 낡은 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코이랄라」씨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이 화원을 빠져 들어가 보라, 거기 있다』는 대답이었다. 과연 화원을 지나 조그만 소로가 맞닿는 곳에 초라한 2층집이 있었다.

<인정부서 호위병배치>
원래 물건을 넣는 창고이었는데 이를 개조, 주택으로 한 듯하다. 그곳에 이르니 착검한 총을든 병사가 나의 신분을 물었다. 수상으로 있을 때의「코이랄라」씨 저택에는 호위병이 없었는데 지금은 군인이 경비를 하고있는 것이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마헨드라」국왕이 자객을 보냈다는 정보가 있어 인도정부가 호위병을 보냈다는 것이다.
「코이랄라」씨는 2층에 살고 있었다. 먼저 층계를 내려와 필자를 맞은 것은 그의 부인이었다. 부인의 모습을 쳐다본 필자는 아연 실색했다. l6년전에「코이랄라」씨의 부인을 처음 봤을 때는 터질듯 한 젊음을 간직했었다.
그러나 이젠 백발이 되어 있었다. 남편의 8년간의 구금생활의 뒷바라지를 해온 고생의 흔적이 그 휜 머리카락에 나타나 있었다.

<민의획득에 자신만만
얼굴은 여전히 단안이라서 한층 더 감상을 느끼게 했다.「코이랄라」씨와 필자는 16년간의 친교가 있는 것이다. 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필자의 자택에도 찾아와 내 딸아이에게「요가」에 있는 물구나무서기까지 해보여 주었다. 토론은 꽃을 피워 밤늦도록 계속됐다.
「코이랄라」씨는 이제라도 총선거를 행하면 전번보다도 훨씬 더 압승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다른 사람 말이라면 필자는 과장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지난번 자금사정도 나쁘고, 또한 3명의 전수상들을 상대편에 빼앗기고 더구나 공산당까지 적대하고 있던 불리한 입장에서도 그렇게 대승했던 사람인만큼 그의 말을 단순한 허세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국왕의 무력에 무력>
그러나 국왕은 무력을 가지고 있다. 국제적으로 보면 문제도 안되는 작은 군대지만 국내 유일의 무력이다. 이에 대결하려면 뭐니해도 다소의 무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코이라랄」씨는「버마」의「우·누」씨와 똑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도와「네팔」사이는「오픈·프런티어」로서 어느곳에도 보조는 서 있지 않다. 비행기로 왕복하는 경우는 여권의 기사를 받으나 육로를 취할때는 아무런 검사도 없다.「코이랄라」씨 자신은 인도영내에 머무르고「네팔」국내로 들어가기를 피하고 있으나 그의 동지들은 수시로「코이랄라」씨를 만나곤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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