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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김찬삼 여행기<필리핀을 떠나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세브」섬을 떠난 배는 징검다리가 되는 여러 섬들을 거쳐 「마닐라」항을 향하고 있다. 남북 종단 여행을 하는 20일 동안 모기며 그 밖의 물 것에 많이 물려 퉁퉁 붓기도 했고 숲속의 웅덩이에서 빨래를 하다가 독사에 물릴 뻔도 했다. 그런가 하면 산악지대며 벽지를 싸다니느라고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날이 많았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바라는 고행이니, 하나의 쾌락일수도 있지만 육체적 고통은 초월할 수 없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문득 성인들의 생애를 생각해 보았다. 설산에서 무릎이 썩도록 좌선한 석가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는 「그리스도」는 갖은 고통을 그 드높은 정신으로 초극하며 법열을 느꼈다지만 이 미물인 나는 공연히 영웅주의에 사로 잡혀 만용을 부리는 고행을 하긴 하나 여기서 아무런 진리도 깨치지 못하고 고통만 느낀 셈이었다.
배는 사나운 파도로 요람처럼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나 피곤한지 대낮인데도 자꾸만 눈이 감긴다. 무슨 잠의 심연 속에 잠기는 듯도 하고 죽음의 보금자리와도 같이 안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쉴새가 없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여행으로 들어가는 듯이 더욱 바빠진다. 이런 항해 중에서도 여기저기서 얻은 문헌을 보아야 하고 여행기 원고 이외의 기록들을 잊기 전에 써두어야 하니 눈코 뜰 새가 없다. 게다가 금전출납부, 사기촬영 「필름」들의 정리를 해야하니 그야말로 1인 10역이랄까. 볼 것은 많고 시간은 없어 종종걸음으로 싸다니다 보면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스치는 듯한 아쉬움이 없지도 않았다.
세계는 아직도 신비의 「베일」속에 싸여있다. 이 「필리핀」만 하더라도 아직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았다. 이것을 뒤늦게 나마 하나하나 발견하는 것이 고작 나의 기쁨이라고 나 할까. 이번 종단 여행에서 이 나라의 윤곽이나마 보는 듯했다.
「필리핀」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1·36배이며 인구는 3천 3백만명이지만, 7천 백여개의 수많은 크고 작은 섬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다가, 종족이며 언어가 각기 달라서 흡사 천연 인종원을 이루고 있었다. 아니 여러나라가 한데 모인 듯한 느낌이었다. 「스페인」과의 혼혈로 이루어진 민족인 만큼 그 피부 빛깔도 백색이며 갈색의 여러 가지였다.
「스페인」 사람은 얼마나 강하기에 정신적으로는 종교로써 [필리핀」에 혼혈 아닌 이식을 하고, 또 육체적으로 수혈을 시켰는지 놀라왔다. 성이 인생의 전부라고 하는 정신분석학자의 말처럼 성이 세계의 전부라고 하면 나의 역설일까.
그런데 이 나라의 사회는 「스페인」과 미국의 통치 때의 지주·재벌인 상류계급, 미국 통치 후 생긴 교사, 의사를 비롯한 지식인이라는 중류계급, 「스페인」 통치 이전부터 내려오는 가난한 서민인 하류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류일수록 그 생활은 「스페인」과 미국의 색채가 짙다.
그리고 「힌두」교·불교·「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있긴 하나 거의 「가톨릭」이었다. 그러나 시골에는 「스페인」이 정복하기 이전에도 있었던 민족고유의 신앙이 남아있었다. 워낙 종족이 많고 보니 이 신앙의 이름이나 형태가 가지가지지만 하나의 신이 있는 것이다. 그 신이란 해와 달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닭이나 악어가 되기도 하는 이른바 물신교인데 산악지대나 벽지에서는 여전히 이런 원시종교를 믿고있었다. 또 도시사람들도 그렇지만 시골 사람들도 좀 유식한 사람은 대화를 나눌 때엔 「사비」(격언)를 종종 쓰는 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이「사비」의 수는 놀랍게도 1천여개나 된다고 한다.
예를 든다면 『친절은 그 집의 크고 작음이나 접시수로 헤아리지는 못한다.』『막대기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떨어질 때 제일 큰 상처를 입는다』라는 것이다. 고대 「필리핀」 사람들은 이런 격언을 조개껍데기나 나무꼬챙이 따위로 「바나나」의 잎사귀나 나무껍질이나 또는 참대에 아로새겼다는 것이다. 이런 유물은 고고학의 대상이니 쉽게 찾아내기는 어려운 일이라 얻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스페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나라에 이렇다 할 문화가 없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옛날부터 훌륭한 격언을 지니도록 이 민족도 고유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한다. 이들의 푸짐한 격언과 우리나라의 속담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은 학술분야가 되는 것이 아닐까 했다.
필자 김찬삼씨는 이 원고를 송고하고 「필리핀」을 떠나, 현재 「싱가로프」 및 「말레이지아」를 여행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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