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수표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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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옛 것은 잊혀지고 사라져야만 하는가? 서울의 유서 깊은 유적이 도시발달과 인구집중에 밀려 하나 둘 우리들의 눈앞에서 그 자취를 감추며 또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서울의 모습 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져 가는 유적을 찾아 옛 것을 되새기며 오늘의 모습을 가늠 해 본다.
청계천 복개로 제자리에서 사라진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 한 구석에서 설움을 받고 있다. 수표교가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진지도 10년. 다리 한복판에 구멍이 뚫어지고 교판의 돌 사이에 큼직한 금이 가도 이를 보존해야할 당국의 눈은 외면된 채 있다.
길이 20m, 폭 5m로 설계가 아담하게 조화되고 예술성이 있어 수표교는 5백년 동안 이조의 대표적인 돌다리로 손꼽혀 왔다.
4백 50여 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된 이 다리는 6모로 깎아 만든 10간 50개의 2층 교각 위에 길고 네모진 돌을 시렁(항)처럼 얹고 그 시렁사이에 2m 길이의 4각 돌2백여 개를 깔아서 교판을 만들었다.
순전히 돌기둥만으로 교묘히 엮어서 만든 「고인돌 공법」의 정화이다.
이 다리는 1422년이래 지금의 청계천 2가 네거리에 있다가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서울시에 의해 장충단으로 옮겨졌다.
서울시는 이 다리를 원형대로 보존한다고 옮겨 놓고서는 설명 게시판이나 경고판 하나 붙이지 않고 방치, 「트럭」들이 이 다리 위를 다니다가 지난해부터 한복판인 내려 않는 등 파괴되고 만 것이다.
이 다리가 청계천에 있을 때는 언제부터인지 다리 밟기(답교)라는 민속마저 전해질 정도로 사랑을 받았었다.
정월 대보름날 달이 크게 뜨면 총각 처녀들이 몰려나와 밤새도록 달구경을 하며 다리 위를 거닐었다는 것.
내외가 심한 때였지만 1년 중 이날만은 수표교 위에서 총각 처녀가 부끄럼 없이 만나는 게 허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의 명칭과, 처음부터 돌다리였느냐 하는 유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고 있다.
태종 실록 12년(1422) 2월 경오조에는 조그만 또랑(구)이던 개천을 전라·충청·경상 3도의 5만 군을 동원, 개착해서 지금의 청계천을 만들었다. 그때 정선방동구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수표교라는 것.
또 세종 실록 3년 7월 계해조에는 정선방구교가 나무로 되어 큰 비만 오면 떠내려가므로 견고하게 돌로 개축하였다고 씌어있다.
여하튼 이 다리가 수표교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세종 23년(1441)부터 이다.
비가 올 때 청계천의 수심을 재기 위해 다리 서쪽에 1척마다 표를 지른 10척 높이의 나무기둥을 세웠다.
그후 성종 때 표목을 돌기둥으로 바꾸어 세웠다. 이 수표석으로 홍수의 정도를 쟀고 모래가 4, 5척 쌓이면 청계천 준설공사를 했다.
수표석을 관리하기 위해 세종 때부터 청계천 옆에 예조 소속으로 준천사를 두어 장 1명, 관리직 2명, 직접 개울에 내려가 물을 재는 수표직 1명 등 4명의 관리가 상주, 그 결과를 한성 판윤에게 보고했었다.
돌난간까지 붙은 이 예술의 다리 위로 도포자락에 나막신소리를 「달그락」거리며 청계천을 건너는 모습은 옛날 서울의 한 멋이었다.
오늘날 이 다리가 옮겨져 방치된 채로 부서져 가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가도로가 달리는 그 아래 어느 지점이 수표교가 있었는지 알 수도 없게 되어있다.
옛날 수표교가 놓여 있던 그 자리에 하나의 표시 판이라도 세워, 옛것을 되새기고 현재 그 모습이 장충단 공원 안에 복원되어 있다고 설명해 줄 성의는 불필요한 것일까? 【손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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