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끈덕진 행소 끝에 다시 군복 입은 이가영 여군 중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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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군 초창기부터 『장교가 아기를 낳으면 예편된다』는 내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69년5월 31일 이가영 중령이 아기를 낳은 지 3개월만에 예편 명령을 받음으로써 최초의 「전례」가 생겼고 이 중령은 1년 7개월의 법정투쟁 끝에 이 전례를 무너뜨리고 또 하나의 전례를 수립 「2개의 전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50년 9월 6일 피난지 부산에서 창설된 여군은 초창기부터 사병의 결혼을 금하고 있었다. 장교에게는 결혼이 허락되었고, 결혼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오는 임신과 출산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국가 공무원 법에 따라 군 복무령에 2개월의 출산휴가 규정을 두고 여군도 엄마가 될 수 있는 여자의 특권을 누리게 해줬다. 실제로 그 동안 많은 여군장교들이 엄마가 되었다.
64년 12월 육규 600의 37항에『여군장교는 결혼은 하되 임신은 금한다』는 규제가 생기기 이전까지 아기를 낳고 엄마가 되는 여군장교는 다른 어떤 여자와 마찬가지로 공개적인 축복과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사정은 달라졌다. 아무리 상위 법률에 위배되는 육규라 해도「군대의 내규」라는 서슬 퍼런 위력이 있었다. 그 내규가 생긴 후 임신한 장교들은 공개된 축복 대신에 죄라도 지은 듯한 갈등 끝에 끝내는 사직원을 내고 군복을 벗었다. 상위 법률에 위배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이런 내규만으로 안심한 군 당국의 속마음에 『임신한 여군은 두말 없이 나가주겠지』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내규는 어차피 불안정한 것이었다. 제정된지 5년 만인 69년 5월 그 내규는 용기 있는 한 여군장교의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도전해온 이가영 중령은 여군 1기생으로 입대, 17년을 복무해온 여군 타자병 교육의 개척자였다. 대전 여고를 졸업하고 여자 의용군 교육대에 편입한 그는 고급 부관학교 갑종 8기생으로 임관됐고, 57년엔 여군 최초로 미국에 유학, 초등 군사반 훈련을 받고 오기도 했다. 교수부장과 여군과장을 역임했던 그는 어느 모로 봐도 만만치 않은 여군장교였다.
그의 임신 역시 군에서의 위치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은 물론이다. 군에서 꽃다운 나이를 다 흘려보낸 이 중령은 37살에 회사원 이석호씨와 중매로 결혼했고, 문제가 임신은 그 나이에 얻은 첫 기쁨이었다.
양쪽의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사정이었지만 이 중령은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군인답게 행동하고 나선 것이다.
67년 5월 결혼, 9월에 『임신했다』고 여군처장(노선익)에게 보고한 이 중령은 12월에 『전역 지원서를 내라』는 요구를 받게됐다. 국방부에서 그 동안 받은 5, 6종의 표창장 사본과 관계 법조문을 한데 묶어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68년 4월엔 「현역복무 부적격자 심사위원회」에 회부되었고 5월 3l일로 제대명령이 내려왔다.
이 중령은 즉각 국방부를 상대로 전역 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부관학교 동기생인 변호사 이명갑씨가 법정 투쟁을 지원했고, 소송은 1년 7개월을 끌던 끝에 70년 2월 이 중령의 승소로 끝났다. 이 중령은 그 동안 밀린 봉급 60여 만원을 받고 군대에 복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1천명 정도인 여군은 대령 「티오」를 하나밖에 갖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미혼의 장교가 많이 있으며 이런 여군 안의 미묘한 사정은 『여군장교의 출산금지』 내규제정을 촉진한 것이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군복입고 배가 부른 여군장교의 모습』이 늘 눈에 거슬려 『일반 공무원과는 다른 특수한 여군의 위치』가 강조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불합리한 응급조처 만으론 안되지 않습니까.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군인의 기본적인 정신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이번에 제가 후배 장교들이 마음놓고 엄마가 될 수 있는 전례를 만든 것에 대해서는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가영 중령은 지금 군에 되돌아가기 위해 2년 동안 벗어 두었던 군복 손질을 하고 있다.<장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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