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마젤란」의 발자취를 더듬어|김찬삼 여행기<필리핀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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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적도에서 가까운 「다바오」에서 다시「마닐라」로 돌아가는 데는 물론 딴 「코스」를 밟았다. 이번「필리핀」종단 여행은 여러 섬의 내륙도 깊숙히 다니긴 했지만 행해도 많았다. 바다를 다니노라면 가지가지 연상과 사색을 불러일으키지만 시인「바일런」이 노래한 것처럼 뭐니뭐니해도 바다의 인상은 늙지 않은 영원한 청춘을 누리는「이미지」가 아닐까. 배는「비사야스」제도에 다시 들어오자 「세브」섬의 서울인「세브」항에 닿았다. 「세브」시란 곳은 16세기에 저 이름높은「포르투갈」의 항해가「마젤란」이 세계일주 때 상륙했던 역사적인 곳이다.
또 이 섬의 추장의 독살을 맞고 죽은 곳이기도 하다. 「세브」항의 부두에 가까운 곳에는 그 옛날 「마젤란」이 발을 디뎠다는 곳이 있다기에 가 보았다. 십자가를 세우고 최초의 예배를 보았다는 자리에는 정자 같은 것이 서 있는데, 이 안에는 바로 그때의 십자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 정자의 천장에는 둘로 나뉘어서 「마젤란」이 처음 상륙하여 예배를 보는 장면과 또는 이곳 추장과 원주민들에게 영세를 주는 장면이 각각 그려져 있다.
이 정자 바로 곁에는 1565년에 창립되었다는「산·오거스틴」성당이 있는데, 이것은 이 나라에 맨 처음「가톨릭」이 들어온 역사적인 유물로서 고색 유연한 유풍이 감돌았다. 이 도시는「스페인」풍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 유물들을 두루 보고서는 「세브」시 남쪽에 있는 「페드로」라는 삼각형의 보루를 보러 갔다. 이것은 「스페인」사람이 이곳을 지배한 때 만든 것인데, 녹슨 그때의 대포가 바다 쪽을 향하고 있었으며 자그마한 동물원으로 되어있었다. 여기까지 친절히 안내해준 사람은 60㎝가 넘는 머리카락을 길게 드리웠기 때문에 무슨 「비틀즈」족의 흉내나 아닌가 했더니, 그는 다름 아닌 광명교단(Lamp-lighters Sect)의 한 사람이었다.
이 교단의 단원들은 이렇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는데 이들의 이념은 세계의 평화라는 것이다. 이들은 인도 「힌두」교도들이 성우사상을 받들 듯이 원숭이를 무엇보다도 존중히 여기는, 이른바 성원사상을 받든다는 것이다.
폭이 좁은 대안에는 둘레 35㎞의 평탄한 석탄질로 이루어진 「막탄」섬이 있었다. 이곳은 바로 그 옛날「마젤란」이 이「세브」섬 추장「라푸·라푸」의 초대를 받고 갔다가 피살된 곳으로서 이 두 사람의 비가 서있다.
재미있는 것은 「마젤란」쪽에는 <「필리핀」을 발견한 최초의 「유럽」사람, 이곳에서 죽었다.…>는 글이 아로새겨져있는가 하면「라푸·라푸」쪽에는 <「유럽」사람을 쓰러트린 최초의 「필리핀」사람…>이라는 글월이 쓰여있다. 어느 쪽이 위대하다는 것인지, 혹은 둘 다 위대하다는 것인지, 어쨌든 하나의 상극이 이처럼 나란히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 희한했다. 「세브」시는 16세기 중엽 「스페인」원정군이 식민지 정책의 맨 처음의 근거지로 삼은 곳으로서 그 뒤 총독부가 「마닐라」시로 옮긴 뒤에도 「필리핀」중남부를 다스리는 근거지로 발전했던 역사를 지닌 곳이다.
「마닐라」「퀘손」다음 가는 제 3의 대도시이며 이 나라 중남부의 해공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한때 「스페인」문화의 이식지이었던 만큼「스페인」과「필리핀」과의 혼혈족인「메소티조」가 많이 보였다. 이「메소티조」란 평화적인 국제친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침략으로 말미암은 부산물이고 보니 이 혼혈이란 불륜의 표상이긴 하지만 「프랑스」법전의 명언처럼 『죄 있는 결합에 죄 없는 씨』가 아일까. 특히 이「메소티조」 혼혈미인은「차밍」하며 매우「섹시」한 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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