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에세이] 시드니 酒香에 취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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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포도는 온난한 기후를 좋아하는 과일이어서 너무 덥거나 너무 춥지 않은 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재배할 수 있다.

하지만 연간 평균기온이 10~20℃의 범위에 있어야 하고 강우량과 일조량도 적당해야 하는 등 세부 조건은 꽤 까다로운 편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지역은 대략 북위 30~50도, 남위 20~40도의 범위 안에 위치하는 온대지역이다. 지구상으로 남북 두 군데의 와인벨트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몇천년에 걸쳐 와인을 생산해 온 북반구의 와인 생산국들에 대비해 남반구의 와인벨트에 위치한 신흥 와인 생산국들을 뉴월드라고 총칭한다.

호주.뉴질랜드.칠레.아르헨티나.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이 신생 와인 생산국 그룹에 속한다.

와인이 역사적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지만 유럽의 기후적 조건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이나 뉴월드의 국가들은 유럽과 달라 저온과 일조량 부족으로 인한 발육 부진, 높은 습도로 야기되는 병충해의 피해나 당도 부족 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거의 매년 무난히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뉴월드의 와인 생산국들은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기후와 토양이라는 천혜의 혜택을 받으며 질 좋은 와인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와인 생산의 역사가 일천하다보니 오히려 유럽 국가들이 받고 있는 엄격한 규칙과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고와 기술을 저항감 없이 채택하기도 했다. 이것이 이들 국가가 최근 20여년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이유다.

프랑스 와인은 생산지역이 중요해 보르도. 버건디 등 지역명을 표시함으로써 와인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미국이나 뉴월드 각국 등 와인 후발국가들의 경우에는 지역명이 아닌 포도 품종으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이러한 와인 품종 표시를 버라이어털 와인(Varietal wine)이라고 한다. 드물게는 와인 산지명을 그대로 표시하기도 하는데 이를 제네릭 와인(Generic wine)이라고 한다.

나는 뉴월드 국가 중에선 호주만 업무상 두 번 다녀왔다. 호주에서의 와인 체험은 내가 가진 상식을 뒤엎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1987년에 처음 시드니를 방문했을 때 옛 부두 옆의 중국 식당에서 큰 가재에 곁들여 마신 마운트아담(Mountadam)의 샤르도네는 버건디의 샤르도네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크통에서 숙성된 과일의 단맛과 풍부한 과실향이 나를 압도했다. 그날부터 나는 호주의 와인이 종주국인 프랑스 와인과는 다른 차원의 풍미를 갖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다음날 호주 중앙은행의 만찬에서 맛본 펜폴드(Penfolds Bin 707)도 최상의 보르도 와인에 버금가는 카베르네 소비뇽의 중후함을 띠고 있었다.

사실 호주의 시라즈.카베르네 소비뇽.샤르도네.세미용은 가히 국제적 수준으로서 와인의 종주국 프랑스와는 또 다른 독특한 맛과 향을 자랑한다.

이같은 신선한 체험은 그 후 와인 신생국인 칠레.뉴질랜드. 아르헨티나.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와인을 접하게 되면서 반복돼갔다. 그 결과 같은 가격이면 뉴월드의 와인을 선택한다는 나만의 원칙을 갖게 됐다.

김명호 한국은행 전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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