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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평화 기원" … 아소는 '사실상 항모' 진수 도끼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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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소 다로가 6일 오후 이즈모함 진수식에서 도끼로 진수대를 내리치고 있다. [요코하마 AP=뉴시스]

6일 오전 8시15분. 일본 히로시마(廣島) 평화기념공원에 ‘평화의 종’이 울리자 시민들은 일제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68년 전 바로 이 시간 히로시마에는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7만8000명이 즉사했고 이후 4개월간 사망자는 16만6000명에 달했다. 68년의 세월 속에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해 사망한 이들의 숫자는 올해로 28만6818명. 인류의 비극이었다. 이날 ‘원폭 희생자 위령식·평화기념식’에는 5만 명의 일반 시민이 운집했다. 존 루스 주일 미국대사 등 70개국 대표단도 참석했다.

 인사말에 나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피폭 국가 일본의 책무’를 강조했다. 그는 “우리 일본인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전쟁 피폭 국민으로서 확실하게 핵무기가 없는 세상을 실현해나갈 책무가 있다”며 “그 비도(非道·잘못된 길)를 후세에, 그리고 전 세계에 계속 알려야 할 사명이 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또 “핵무기 근절과 세계의 영원한 평화 실현에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고 강조했다.

아베 “군축 이니셔티브 회담 유치할 것”

 아베의 수사(修辭)는 현실 행보와 차이가 났다. 아베 정권은 평화헌법을 뜯어고치는 개헌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무력 행사가 가능한 대규모 ‘국방군’을 보유하겠다는 주장이다. 또 지난 4월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준비회의에서 채택한 ‘핵무기의 인도적 영향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을 거부했다. 성명의 ‘어떠한 환경에서도 핵무기는 사용돼선 안 된다’는 표현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원전 수출에도 적극적이다.

 아베는 “지난해 우리나라(일본)가 유엔총회에 제출한 핵군축 결의는 사상 최다인 99개국을 공동 제안국으로 이끌어 압도적 찬성으로 채택됐다”며 “내년에는 우리가 주도해온 비(非)핵무기 국가 간 모임인 ‘군축·불확산 이니셔티브(NPDI)’의 외교장관회담을 히로시마에서 개최할 것”이라고 말했다. 행사 후 인근 평화기념자료관을 방문해 방명록에 ‘기(祈) 평화’라고 적었다.

 히로시마 행사 7시간 뒤인 6일 오후 3시15분 도쿄 인근 요코하마(橫濱) 바닷가. 아베와 더불어 현 정권의 투 톱이자 ‘나치 망언’의 장본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나타났다. 방위성 장관을 지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자민당 간사장도 자리를 같이했다.

 1954년 발족한 해상자위대 역사상 최대 군함인 ‘이즈모’의 진수식 행사였다. 명목은 호위함이지만 규모나 운용능력을 볼 때 사실상 항공모함이다. 갑판을 개조하면 스텔스 전투기 F-35B를 탑재할 수 있다. 이즈모의 선미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아시아 각국을 침공했던 일본 해군의 군기이자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가 일장기와 함께 펄럭이고 있었다. 욱일승천기는 현 해상자위대 깃발이기도 하다. 군함 이름도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 해군의 순양함으로 제3함대 기함(旗艦)이었던 이즈모에서 그대로 따왔다. 이즈모는 37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견돼 수많은 중국 어뢰정의 공격을 피하며 상처 없이 귀환한 전설적 존재다.

 아소 부총리는 해상자위대의 가와노 가쓰토시(河野克俊) 해상막료장(우리의 해군 참모총장)과 함께 진수 장면을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진수 도끼로 직접 진수대를 내려치기도 했다.

이즈모 개조 땐 스텔스기 F-35B 탑재

 자위대 사상 최대 군함에 이즈모란 이름을 붙이고 그 진수식을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 방위성 해상막료감부 홍보실 관계자는 “조수 간만 등을 감안해 밀물에다 날짜도 대안(大安)인 날을 고르다 보니 공교롭게 6일이 됐다”고 말했다. ‘대안’은 일본에서 길일(吉日)로 여겨지는 날로, 보통 한 달에 5~6일 있다. 또 전함에는 보통 일본 각 지방의 옛이름을 붙이는 게 관례로 시마네(島根)현의 옛이름인 이즈모란 이름을 썼던 옛 순양함의 함명(艦名)을 그대로 가져왔을 뿐이란 설명이다.

배 이름, 한때 진주만 공격 ‘나가토’ 검토

 하지만 이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밀물+대안’인 날은 드물지 않다. 진수식을 꼭 찍어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로 잡을 이유가 없다. 함명과 관련해 마이니치(每日)신문은 지난달 27일 “당초 해상자위대에선 호위함의 이름으로 ‘나가토(長門)’를 가장 유력하게 검토했으나 국내외에서 큰 파문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나가토의 ‘부활’이 유보됐다”고 보도했다.

 나가토는 아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현 서부의 옛이름으로, 41년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사령관이 승선해 진주만 공격을 진두 지휘했던 군함 이름이기도 하다. 3만3800t급에 세계 최초로 41㎝포를 장착했으며 45년 종전까지 침몰하지 않은 일본 해군 유일의 전함이었다. 일본 해군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일본 패전 이후 미군에 접수돼 46년 7월 두 차례에 걸친 핵실험 표적으로 사용된 뒤 태평양 바다로 사라졌다.

 신문은 “새 전함 이름을 나가토로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했으나 미국을 자극할 것을 우려해 바꾸게 됐다”고 전했다. 한국의 한 군사 전문가는 “막판에 ‘급’을 한 단계 낮추기는 했지만 진주만 작전의 기함으로 활약했던 나가토를 67년 만에 부활시키려 했던 것이나 항공모함형 호위함의 진수식을 원폭 투하일로 잡은 건 일본 자위대, 군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 산케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욱일기 사용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정부 견해로 공식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6일 보도했다. 이에 대해 중국 매체들은 일제히 “욱일기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 통치하고 중국 침략 전쟁을 벌일 때 사용하던 전범기”라고 비난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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