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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고노 담화 20년, 피해자로 둔갑한 가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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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승욱
도쿄 특파원

고노 담화가 발표된 지 4일로 20년을 맞았다. 담화는 1993년 8월 4일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가 발표했다.

 담화는 “위안부는 감언과 강압 등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고, 관헌 등이 직접 가담한 것도 분명히 밝혀졌다”며 일제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또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담화 발표 전 일본 정부는 서울에서 위안부 생존자 16명의 증언을 청취했다. 이들은 가슴 찢어지는 사연을 털어놓았다. 담화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데엔 이 생생한 증언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 16명 중 현재 생존자는 두 명뿐이다.

 3일자 아사히 신문은 담화 발표 20주년을 맞아 생존해 있는 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실었다. 상대 남성에게 저항하다 폭행당해 왼쪽 팔꿈치가 비틀어진 윤순만 할머니는 병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TV 뉴스에 일본 사람만 나오면 “위안부 이야기냐”고 딸에게 물을 정도로 한이 남았다. 히로시마의 위안소에 5개월간 강제 동원됐던 김경순 할머니는 이때 얻은 병 때문에 자녀들의 몸이 약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평생을 살아왔다고 한다.

 이런 용기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태어난 고노 담화는 지금 존립을 걱정해야 할 최대 시련을 겪고 있다. “위안부는 필요했다”는 44세 우익 정치인 하시모토 도루는 “강제 동원의 증거는 어디에도 없는데 고노 담화 때문에 일본만 비난받는다”고 주장했다. 또 과거 “고노 담화는 사기꾼 같은 사람이 쓴 책이 마치 사실처럼 퍼져서 벌어졌다”고 했던 아베 신조 총리는 중의원에 이어 참의원까지 석권하며 담화 수정의 기회만 엿보고 있다. “후손들이 ‘위안부 강제 동원’이란 불명예의 짐을 계속 지도록 할 수는 없다”는 그에게 일본은 억울하게 비난 받는 피해자일 뿐이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서자 “한국의 역사 왜곡이 미국에서 통하는 건 고노 담화 때문”이라며 펄펄 뛰는 우익 언론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20년 전 담화 발표 때 관방 부장관이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4일자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노 담화의 포인트는 위안부 시각에서 문제를 봤다는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인 위안부 입장에서 봤더니 자기 의사에 반해 위안부로 동원된 게 분명하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가해자인 일본을 피해자로, 한국을 역사 왜곡의 가해자로 돌려놓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도 구분 못하는 이들의 손에 멋대로 재단당하며 맞이한 고노 담화의 성년식이 애처롭다.

서승욱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