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통신] 1000여 인간방패 바그다드 집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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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두렵지 않으냐고요? 절대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지난 14일 바그다드 외곽에 위치한 순교자 기념 성지.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군의 오폭으로 민간인 4백여명이 몰살당한 아말리 방공호를 유적으로 단장해 놓은 곳이다.

안내원에게서 '미국의 반인륜적 전쟁 범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던 캐나다 국적의 '인간 방패' 자원자 카렌 스미스(50.여)는 말했다.

"단언컨대 우리가 이곳에 버티고 있는 한 미국은 절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 시민들도 우리를 도와줘야 한다. 매일 정오에 1분씩 학살 위기에 놓인 이라크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달라."

'인간 방패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에게 놀아나는 철없는 행동이라고 미국은 주장하는데…'라고 물었다. 그녀는 "후세인 정권이 무너져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면서도 그것은 이라크인들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 미국이 전쟁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자신들은 후세인이 아니라 이라크 국민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인간 방패를 자임하는 외국인들이 이라크로 속속 입국하고 있다. 대부분 유럽과 미국, 러시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라크 정부는 14일까지 1천여명이 들어왔다고 발표했다. 18일 현재 요르단에 머물고 있는 한상진(37)씨 등 한국인 3명도 비자를 받는 대로 인간 방패단에 합류할 예정이다.

현지에서 만난 인간 방패 자원자들은 직장 은퇴 후 시골에서 노후를 즐기던 노부부, 유모차를 끌고 온 주부 등 평범한 시민이 대부분이었다. '투사'와는 거리가 먼 이들은 거창한 구호 대신 "이라크 아이들이 불쌍해 보여서"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같은 말로 방패를 자임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왔다는 알베르토(71)할아버지는 "집사람과 아들 부부와 함께 그리스.터키.시리아를 여행한 뒤 입국했다"며 자랑스레 'Human Shield'라고 수가 놓인 손목띠를 들어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어 전쟁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왔다"고 그는 말했다.

이라크 정부는 이들을 '평화의 대사(Ambassador of Peace)'라고 부르며 적극 환영하고 있다. 이라크의 장관급 기구인 '국제연대.평화.우호를 위한 국민협회'가 직접 나서 이라크에 입국한 '대사'들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

협회장인 알리 카시미는 "전쟁이 나면 미국은 이라크의 통신.전기.정수시설을 가장 먼저 공습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이들 시설에 '대사'들을 집중 배치할 계획"이라고 말해 외국인들을 볼모 삼아 미국의 공격에 대항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라크 시민들이 인간 방패 자원자들에 대해 좋은 감정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시민은 "정말 미국이 공격을 개시하면 바로 도망갈 사람들"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인간 방패를 취재하던 한 외국인 기자도 "이들과 인터뷰를 해보면 대부분 전쟁이 터지기 전에 귀국할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고 털어놓고, "끝까지 남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인간 방패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지금까지 미국이 주도한 전쟁 중 이처럼 극단적인 저항 방식이 등장한 것은 처음이란 사실 자체가 미국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그는 인간 방패 자원자들이 후세인의 '볼모'가 아닌 이라크 국민들의 '대사'로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원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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