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침체와 좌절의 60년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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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0년대는 여러면에서 실망의 시기였다. 선진국들은 고도로 경제성장을 달성했고 개발도상의 몇몇 국가들도 선진국의 예와 같이 고도로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정부가 무능했기 때문에 발전이 저해되었고, 선·후진국간의 경제적 격차를 없애기 위해 선진국이 제공한 원조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인도 대 「파키스탄」의 일전과 그 후 계속된 긴장상태로 남부 「아시아」가 중공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정된 민주주의의 보루로 될 수 없었다.
「아프리카」신생 독립국가들 중에서 가장 희망적인 것처럼 보였던 「나이지리아」도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강대국간의 관계에서는 1962년 「쿠바」에서 미­소가 대결을 극복함으로써 공포를 통제할 수 있는 노력이 이뤄진 것처럼 보였다. 「쿠바」위기에서 미­소 양국은 조심스럽고 성공적으로 전쟁일보 전에서 물러섰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상호안정의 바탕위에 놓여있던 세력균형이 또 한번 불안하게 되었고 비록 전격무기 제한회담이 개시되었지만 핵무기경쟁이 중지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은 할 수 없었다.
2개 초강대국과 비교해 볼 때 중간세력국가의 비중은 더욱 감소되었다. 「케네디」대통령은 영국과 밀접한 협조로 「유럽」통합을 이룩함으로써 「유럽」의 방위에 기여하고 세계에서의 미국의 책임을 덜려는 「웅장한 계획」을 세웠으나 이러한 계획은 퇴색해버렸다. 「유럽」에서 1960년대는 「드골」장군의 시대였다.
「유럽」의 여러나라는 자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드골」의 설교로 「유럽」 여러나라 군대의 통합을 의미하는 서방동맹체제나 「유럽」의 초국가 기조의 유효성이 의문시되었다.
60년대 말에 「드골」이 정계에서 은퇴하여 「프랑스」는 영국등의 구주공동시장가입을 거부했던 정책을 완화할 수 있게끔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구공시는 어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정치적 기대를 할 수 없었고 다만 하나의 관세동맹체로만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면만 보더라도 통화문제 같은 중요한 문제를 구공시는 회원국들끼리만 모여 해결하려들었고 영국도 구공시가 가입의 이점에 점차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서방세계가 미국의 영도하에 일치단결 하는데 실패한 것과 때를 같이해서 「유럽」에 있는 소련의 동맹국들도 자국의 이해관계를 소련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68년 소련이 「체코」를 침공함으로써 동구를 점차 자유화하여 동서화해에 어떤 서곡을 울려보려던 「유럽」공산 여러나라의 희망은 좌절되었다.
소련국내정정을 보더라도 또한 어느 분야에서나 당의 지배가 이완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공산권도 동서 「유럽」간에 더욱 교역을 확대해야되겠다는 압력을 계속 느끼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서독에서 사민당이 집권한 것이 60년대말 「유럽」의 두드러진 정정이었다. 서독사민당의 집권은 동구와 서구가 더욱 접근, 특히 점점 번영하여 이와같은 접근에 다소 귀를 기울이고있는 동독과의 접근할 수 있는 노력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독일이 2개의 별개국가로 분단된 것은 1950년대말과 같이 60년대말에도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소련의 대외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면 이와같은 현실에 다소 영향이 있을 수도 있었으나 그와 같은 변화가 있을 징후는 없었다. 아마 후세의 사가들은 중공­소분쟁을 60년대의 가장 주요한 사건으로 기록할 것이다.
중공­소 두 나라는 60년대말에 국경분쟁을 해결코자 분명히 노력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권에서 노력을 휘어잡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중공의 도전과 세계공산주의운동의 테두리안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소련의 대중공경쟁은 향후 상당한 기간동안 국제정국의 특징으로 등장할 것이다.
중공의 경제 및 집권체제가 문화혁명으로 미궁에 빠져있으나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고 거창한 인구와 풍부한 자원으로 어느 시기엔가는 초강대국의 지위를 노리는 도전자로서의 핵강대국이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중공­소 대립관계와 비교할 때 중공과 미국간의 분쟁은 해결점에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어도 다소 완화된 것처럼 보인다.
미국측에서 보면 월남전은 미국이 월남전은 60년대말 최근2, 3년동안에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국내의 반전여론은 미국이 월남에서 너무 큰 희생을 체험하고 있고 미국의 극동에 대한 개입의 윤곽과 내용을 전체적으로 재고하도록 강요했음이 분명하다.
이와같은 문제가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고 그 형태가 한국과 「타일랜드」등 「아시아」대륙에서의 미국의 개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은 일본의 향후 거취에 달려있다.
즉 10년간 유별없이 번영한 일본이 스스로 택한 수동적인 태도나 고립정책을 탈피하고 다시 「아시아」국제정국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느냐에 달려있다.
이상과 같이 볼 때 1960년대는 국제협력면에서 결실을 거둬보려는 여러나라의 역량은 「하마슐드」가 죽은 이래 「유엔」이 보잘것없는 역할밖에 못하던 1950년대보다는 부족했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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