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 반미 60년' 남은 건 가난 … 결국 미국에 화해 손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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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6일 새벽 5시15분. 쿠바 동남부 산티아고 데 쿠바. 27살의 젊은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와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이끄는 137명의 반군이 지역 방송국과 병원을 장악했다. 5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에게 항거한 것이다. 기세가 오른 반군은 1시간 뒤 몬카다 병영에 총격을 퍼부었다. 쿠바 혁명의 시발인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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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정확히 60년이 흐른 지난 26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쿠바 혁명 6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혁명 1세대 지도부가 젊은 세대에게 점진적으로 권력을 넘겨주고 있다”며 “오늘날 쿠바 국민의 70% 이상이 혁명 승리 이후에 태어났다”고 말했다. 변화하는 쿠바의 모습을 시사한 것이다. 라울 의장 역시 올 초 5년 임기가 끝나는 2018년에 은퇴하겠다고 공언했었다.

 카스트로 형제는 59년 혁명을 성공시켜 친미 바티스타 정권을 축출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선언했다. 이후 미국과의 교류를 단절한 채 50년 넘게 사회주의를 고집해 왔다. 미국의 경제 제재와 갖은 압박을 받았지만 버텼다. 소련한테서 매년 받는 40억~60억 달러 상당의 보조금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91년 소련이 붕괴하자 쿠바는 경제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89~93년 사이 국내총생산(GDP)은 33%나 하락했다. 이후 주변 남미 국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베네수엘라가 대표적이다. 쿠바는 베네수엘라로부터 원유를 싼값에 들여오고 매년 50억 달러의 보조금을 받는다. 하지만 이 협정을 맺은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사망하고 베네수엘라 경제 상황이 악화하면서 원조가 언제 끊길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베네수엘라가 협정을 재고할 경우 쿠바는 서서히 멈추게 될 것이며 쿠바는 새로운 수입 창출원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는 게 파이낸셜타임스의 분석이다.

 이런 위기의식이 쿠바로 하여금 미국 등 서방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게 만들었다. 외부 지원 없이 자력갱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카스트로 정권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난과 관료 부패, 국영기업의 독점 등으로 혁명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와 중산층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진 것도 정권의 변화를 부추겼다.

 쿠바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기밀정보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망명과 관련해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라울은 망명을 제안한 베네수엘라·니카라과·볼리비아 등 3국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입장은 밝히지 않았다. 스노든이 탑승한 항공기의 자국 영공 통과를 허용할지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스노든이 홍콩을 떠나 쿠바로 바로 향하지 않은 것도 쿠바에서 체포돼 미국으로 송환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과거 대표적인 미국 정치범과 범죄자들의 망명처였던 쿠바는 2006년 이후 미국 도망자들을 받지 않고 있다. 자력갱생을 위해서는 미국을 마냥 외면할 수 없고, 남미 국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게 쿠바의 현실이다.

 이런 쿠바의 변화를 미국은 반기고 있다. 지난 16일 파나마 운하에서 북한 선박에 실린 쿠바 무기가 적발된 사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쿠바는 다음 날 예정됐던 이민자 협상을 워싱턴에서 재개했다. CNN은 “오랫동안 얼어붙었던 두 나라가 해빙기에 들어섰다는 표시”라고 전했다. 여기에 50년간 막혀 있던 우편 서비스 재개도 논의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09년 쿠바에 가족을 둔 미국인들의 쿠바 방문을 허용하고 송금 제한도 철폐했다. 이 조치 이후 매년 50억 달러(약 5조5600억원)가 미국에서 쿠바로 흘러간다.

 돈의 위력은 컸다. 부동산 거래가 활성화되고 소비가 늘었다. 쿠바 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4만5000건의 부동산 거래가 일어났다. 라울 의장은 경제개혁으로 여기에 속도를 더했다. 라울 의장은 2010년 180개 업종에 걸쳐 자영업을 허용하고, 경제발전을 위해 공공부문 일자리 100만 개를 줄이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미국은 별 영향을 주지 못하던 제재 대신 교류를 늘려 쿠바의 개방을 유도한다는 전략이다. 천연자원의 보고인 중남미 지역을 중국에 내줄 수 없다는 견제 심리도 작용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오바마 대통령과의 실무회담 전 멕시코·코스타리카 등을 들르며 중남미 순방을 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로버트 패스토 역시 “최근 미국과 쿠바의 관계 변화는 더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두 나라의 욕망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채승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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