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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야」는 이렇게 죽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스탈린」시대의 비밀경찰 두목「라브렌리·배리야」의 최후에 관해서는 재판을 통한 처형 설과「흐루시초프」에 의한 총살 설이 맞서 왔다. 그러나「스탈린」시대 말기부터 금년 초까지 「모스크바」대학과 「바르샤바」대학의 철학교수로 있다가 서방 쪽으로 망명한 「알렉세이·야쿠셰프」교수(41)가 53년「베리야」재판을 직접 방청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흐루시초프」에 의한 극적인 총살 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야쿠세프」의 당시 제자가운데「블라디미르·트루스」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흐루시초프」의 양자였다.「트루스」의 주선으로「야쿠셰프」는 엄격히 제한된 방청을 할 수가 있었다. 「야쿠셰프」에 의하면 53년 7월「베리야」는 자신의 지위가 불안해지자「다차」의 별장에 가 있었다. 그사이에「주코프」원수가「칸데미로프스카야」「탱크」사단을 「모스크바」에 투입했다 한다. 「베리야」는 비밀경찰 2개 연합의 보호를 받으면서 당정치국과 협상을 벌였다. 정치 국은 마침내「베릭야」를「크렘린」으로 초치했다. 그는「크렘린」이 자기의 심복들에 의해 경비되고 있다는데 안심을 했다. 그는 무장을 하고 왔다.
그러나「주코프」는 날쌘 부하 8명을 정치국 회의실「커튼」뒤에 숨겨 두고 있었다.「베리야」가 들어설 때 누가 그의 체포를 선언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흐루시초프」를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이 『나는 못하겠다』고 발뺌했다. 「주코프」가 십자가를 지기로 자청했다. 「베리야」가 들어서자「주코프」가 일어섰고 그것을 신호로 그의 8명의 부하들이 뛰어나와 재빨리 권총을 빼어드는 「베리야 를 체포한 것이다.
53년12월14일 시작된 재판에서「베리야」에 대한 기소내용은 ①권력남용 ②「그루지야」의「멘셰비키」지지 ③동독을 서독에 넘겨주려 했다 ④수많은 여성들을 겁탈했다는 등이었다. <독「슈피겔」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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