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113> 우민, 시민으로 돌아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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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002년 6월 29일 이임식을 마치고 서울시청을 떠나는 고건 서울시장. 그는 다음날 일본 요코하마 한·일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끝으로 시장 임기를 마무리했다. [중앙포토]

서울시장 임기 내내 나는 한 질문에 시달렸다. “시장 선거에 다시 출마할 겁니까.” 국정감사나 시정질의 자리에서 서른 번 넘게 같은 대답을 해야 했다. 한광옥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표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불출마의 공언을 거둬들일 수가 없습니다. 지난 3년 전 당의 부름을 받아들여 시장 선거에 나섰던 것은 10여 년 전 임명직 시장 시절 구상했다가 타의로 물러나면서 다하지 못했던 일들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물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2000년과 2001년 사이의 일이다. 권노갑 민주당 최고위원과 만났다. 남산이 내다보이는 신라호텔 일식집의 별실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또 시장 ‘삼수(三修)’에 대한 얘기인가 했다. “저는 약속한 대로 다음 시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권 위원이 의외의 말을 했다. “아니 그 얘기 말구요.”

 그는 대선 출마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놀랐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호남 출신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국민은 대탕평 인사를 통해 지역 감정 대립을 해소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탕평 인사를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국정원의 차장급 세 사람을 전부 호남 출신으로 인선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지역 감정이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호남 출신으로 알려진 내가 대선에 뜻을 두고 움직인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권 위원과의 만남은 그렇게 일단락 났다.

얼마 후 강원용 목사가 나에게 차 한잔 하자고 연락해 왔다. 그와는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자주 만났던 사이였다.

 강 목사의 종로구 재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 시장이 짐을 지는 수밖에 없겠어요. 그 뜻을 내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건의하려고 하는데 사전에 본인한테는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만나자고 했어요.”

 “김 대통령에게 그 말씀을 드리지 마십시오.” 강 목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권 위원을 만난 일을 얘기했다. 그런데 강 목사는 이튿날 DJ를 만나 나를 대선 후보로 천거했다. 강 목사의 말에 DJ는 단 한마디 대답을 했다고 한다.

 “고 시장은 호남 출신 아닙니까.”

 그리고 1년여 지난 2001년 말쯤 강 목사가 다시 나에게 만나자고 청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김 대통령에게 또 얘기하려고 합니다.”

 나는 또 만류했지만 그는 DJ를 만났다. 이번엔 그는 DJ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나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시장의 임기 마지막 날인 2002년 6월 30일. 나는 요코하마에서 열린 한·일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했다. 시장으로서 마지막 일정을 일본에서 마쳤다. 7월 1일 인천공항으로 돌아올 때 나는 이미 시장이 아닌 서울시민 중 한 사람이었다. 우민(又民·고 전 총리의 호, ‘다시 또 시민’이란 뜻)으로 돌아왔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나의 서울시 파트너들
이필곤·김정국·허신행 … 자랑스런 일꾼들 만나 행복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한국 역사의 전환기 14년의 앞 2년과 뒤 4년, 모두 6년을 수도 서울의 시장 책임자로 일했다. 서울시 공무원과 많은 일을 함께 해냈다. 그들은 나의 자랑스러운 파트너들이다. 지하철 안에서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다가와서 인사를 한다.

 “시장님, 저 그때 노숙자대책반에서 일했습니다.”

 “아, 그렇지. 그때 정말 애 많이 썼지.”

 파트너들과 이런 우연한 만남은 공인으로서의 보람이고 ‘우민(又民)’으로서 즐거움이다.

 98년 7월 민선 서울시장으로 취임하며 이필곤 삼성그룹 중국본사 대표를 서울시 행정1부시장으로 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다. 이 부시장은 IMF 외환위기 속에 시정 개혁의 밑그림을 그렸고 실행했다. ‘시정업무 재설계(BPR)’와 ‘전자민원처리’ 등 전자정부의 기초도 닦았다. 99년 8월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으로 임명한 김정국 현대중공업 해외영업담당 사장은 지하철공사 경영 합리화, 지하철 무(無)파업 선언을 이끌어냈다.

 허신행 전 농림수산부 장관은 서울시 농수산물공사 사장을 맡아 가락시장을 혁신했다. 우리 정부 최초의 ‘정보화전담관(CIO·chief information officer)’으로 선임된 배경율 상명대 교수는 지하철 8개 노선 터널을 활용해 서울시 전용 초고속 광통신망(e-seoul net)을 만들었고 전자결재시스템도 정착시켰다.

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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