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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전 스탈린의 오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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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경민
뉴욕 특파원

1950년 6월 27일 정오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스톡홀름호텔 레스토랑에서 세 남자가 마주 앉았다. 유엔 주재 소련 대사 야코프 말리크, 미국 대사 어니스트 그로스, 그리고 트리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이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리 사무총장이 슬쩍 말리크를 떠봤다. “오늘 오후 안전보장이사회엔 그만 보이콧 풀고 참석하시죠.” 말리크는 고개를 흔들며 짧게 답했다. “아뇨!” 이날 오후 2시 소집된 안보리는 한국에 대한 유엔 회원국의 군사 지원을 촉구하는 결의안 83호를 전격 통과시켰다.

 63년 전 이 장면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소련은 안보리 결의에 거부권을 쥔 상임이사국이었다.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더라면 유엔군 참전은 봉쇄됐거나 훨씬 늦춰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이 주도한 세 차례 한국전 관련 안보리 결의에 모두 불참했다. 당시 소련은 안보리를 보이콧 중이긴 했다. 대만이 차지하고 있던 상임이사국 자리를 중국에 넘겨주라는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한국전의 명운을 가를 수 있었던 유엔군 파병 결정에까지 불참한 건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는 스탈린의 계산된 시나리오였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동유럽 공산화에 맞서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창설하자 한국전에 미군을 끌어들여 미국의 힘을 분산시키려 했다는 거다. 미국이 참전하면 중국도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중공군의 힘을 빼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스탈린 입장에선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노림수였다는 얘기다. 초반의 양상은 스탈린 각본대로 흘러갔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두 달 만에 낙동강까지 진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설 미군 ‘스미스부대’조차 7월 5일 오산에서 벌인 인민군과의 첫 전투에서 박살 났다.

 그러나 16개국 연합군인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유엔군을 오합지졸(烏合之卒)로 깔봤던 인민군과 중공군은 혼쭐났다. 캐나다·호주·뉴질랜드와 영국 군으로 구성된 영연방 27사단은 51년 4월과 7월 가평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중공군을 두 차례나 막아냈다. 에티오피아의 황실 근위대 3518명은 253번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미국·영국·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1만4936명의 병력을 보낸 터키도 강원도 ‘철의 삼각지대’에서 중공군과 맞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스탈린의 각본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중앙일보가 연재한 ‘정전 60주년 특집기사’를 취재하면서 그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음을 세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16개 참전국 수도엔 어김없이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서있다. 유엔군이 지켜낸 한국은 오늘날 세계 13위 경제대국이 됐다. 어쩌면 지옥에 있는 스탈린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63년 전 자신의 오판을 후회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정경민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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