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3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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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문학을 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참여이다 -김은국

아무도 밟지 않은 땅,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혼자 밟고 혼자서 가는 것이 글을 쓰는 일이다. 농삿일처럼 여럿이 함께 땀을 흘리는 일도 아닌데 들어앉아 글만 쓰면 됐지 단체가 무슨 쓸데 있는 거냐고 문학단체 무용론을 내세우는 문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국가사회라는 조직체의 일원이며 제도적.사회적 환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문인들은 모여서 단체를 만들고 친목과 권익을 도모하며 나라 안팎의 교류와 행사를 갖고 있다.

나는 1961년 저무는 12월 30일 명동 근처의 수도여사대(지금 세종호텔)강당을 오르고 있었다. 5.16으로 해체된 기존의 문학단체 대신 새로 창립하는 단체 총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해 1월 1일이 내가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인 출생신고를 한 셈이니 문단 나이로 돌도 안되어 함부로 끼어드는 철부지였다.

강당에는 김광섭.모윤숙.이헌구.김동리.조연현.곽종원 등 문단의 맹주들을 비롯, 중견에서 신인에 이르는 만만찮은 얼굴들이 무언가 긴장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6.25 때 부산으로 내려갔던 문인들이 반목하다 환도 후인 1955년 결국 자유문학가협회와 한국문학가협회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다 5.16군부가 6월 17일자로 내린 포고령 제6호에 의해 모든 사회문화단체가 해산됐던 것을 문공부가 나서서 예술단체들을 통합, 재건하는 일환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문총)회장을 맡았던 김광섭은 자유문협의 위원장도 겸해 모윤숙.백철.이무영 등과 '자유문학'을 펴내면서 문단의 한 축을 이뤘고, 한국문협은 박종화를 수석대표로 김동리.서정주.황순원.조연현.박두진.박목월 등이 '현대문학'을 발판으로 창작활동을 펴고 있었다.

서로 이해를 달리하던 두 단체를 봉합하는 일이니 회의는 순조롭지 않았다. 첫째 정관을 통과시키는 데 단체의 명칭이 문제였다. 이미 결성된 음악.미술.연극.영화.무용 등 8개 단체는 분야의 이름(예컨대 한국음악협회)만 끼워넣는 것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마땅히 한국문학협회로 명칭을 정해야 한다. 그런데 자유문협측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기존의 한국문학가협회에서 '가'자만 뺀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문인'이 들어갔고 지금 예총산하의 단체들에서 오직 한국문인협회만 돌림자가 틀리게 된 것이다.

둘째 새 이사장의 선출이었다. 두 단체의 수장인 김광섭.박종화는 물론이고 양쪽의 중심이 되는 사람은 이사장으로 뽑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부지리(漁父之利)란 이런 일을 두고 생긴 말인가. 전혀 무색무취의 목사 신분인 68세의 전영택을 이사장으로 뽑는다.

부이사장은 양측에서 김광섭.김동리로 나눠갖고 한 몫은 역시 빛깔도 욕심도 없는 이희승을 지목한다. 그러나 시분과위원장에 서정주, 소설분과 위원장에 황순원 등 결국 한국문협측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전영택 이사장이 겨우 1년을 채우고 박종화 이사장 체제가 된 뒤 한국문인협회에선 자리다툼의 선거바람이 인다. 나같은 햇병아리도 어미닭의 싸움에 말려들게 되는.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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