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 김유신과 송화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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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고구려·백제·신라의 세나라가 서로 공벌침탈(공벌침탈)을 되풀이하던 1천5백년전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비로소 이땅의 민족을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이다.
그가 80평생에 이룩한 빛나는 위훈은 타고난 영웅적기질의 소산만은 아니다. 그가 지(지)와 용(용)을 겸비하기까지에는 오히려 쓰라린 노력이 온생애를 통해 점철되있음을 알수있다.
신라삼산조사단은 지난봄 경주근교의 단석선에서 그가 수도하던 유적을 발견했다. 험준한 산마루의 석굴에서 정신력을 기르던 곳이다.
최근 10월과 11월에는 경주시 충효리에서 두차례의 발굴을 가짐으로써 그와 직접 관련있는「송화방」이라는 한 암자터를 발견했다. 이 뒷산일대는 당시 그의 종중묘지였던것으로 생각되며 이 암자는 바로 소원을 비는 원찰(원찰)이다.
그의 발자취를 현지에서 조사하는 가운데 화랑도의 개념과 인간 김유신의 면모는 훨씬 생생하게 부각되는 느낌이다.
이번 발굴한 절터 뒷산 즉 서관등성이에 있는 김유신묘에 대하여 하계 노대가들 사이에 『이다』『아니다』로 잠시 논전을 벌인 일이 있다. 양쪽의 견해를 경청하는 동안『삼국유사』를 거듭 정독해왔고 여러 차례 현지를 답사했다. 현지에서 속칭되는 지명이 기록과 여러모로 일치했다.
그러면 송화방 터도 있을 것이 아닌가. 우선 지목된 자리가 현김장군의 재실인 수산재부근. 여기서는 일찌기 극히 주목되는 반가사유상이 발견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재실 동쪽 대밭을 파헤치니 과연 주춧돌이 놓였던 자리가 드러났다. 또 통일신라 무렵에만 볼 수 있는 유려한 연화문이 막새기와도 10여점 나왔다. 그밖에 고려때의 기왓장이 보였으나 이조로 내려오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창건과 없어진 연대를 어렴풋이 짐작케 했다. 얼마 안되나마 우리나라의 옛기록과 현지를 확인하는 작업은 너무도 불충분한 현실이다. 이런점에서 근자 국사학계에서 현지 답사열이 높아가는 것은 좋은 경향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부족한 연구비로 제약을 많이 받는 까닭에 학교측의 배려와 특히 사회단체 및 실업계인사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아쉽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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