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세 싫다는 박인비 "불편한 게 더 많거든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박인비가 25일 오후 제주도 제주오라골프장에서 팬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제주=이지연 기자]

여자 골프 세계랭킹 1위 박인비(25·KB금융그룹)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가 한 주 없는 틈을 타 23일 귀국했다.

 첫날 가족과 함께 할아버지의 생신 파티를 한 박인비는 24일 오후 제주도로 날아가 팬 사인회와 스폰서 행사에 참석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 달 반 전 잡힌 스폰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주도행을 강행했다. 기자는 박인비와의 1박2일 제주도 일정을 함께하는 행운을 잡았다.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요”=박인비는 달라진 위상을 실감했다. 구름 취재진과 인파에 둘러싸였고 어딜 가나 유명세를 치렀다. 박인비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놀라웠다. 입국장을 나오는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져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전보다 조금 유명해졌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골프 선수일 뿐”이라며 “솔직히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 운동 선수로서는 불편한 게 더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박인비는 올 시즌 상금으로만 약 24억원을 벌었다. 그러나 정작 상금은 쓸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외모를 꾸미는 데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골프 할 시간도 모자라다고 생각한다. 어머니 김성자(50)씨는 “인비는 명품도 잘 모른다. 심지어 지갑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박인비는 “세계 1위이면서 외모도 뛰어나면 좋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실력”이라며 “지금은 골프를 하고 팬들과 소통하는 데만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는 또 “상품성이 없다는 이야기도 듣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기사 댓글에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요즘엔 그러려니 생각한다”고 웃었다.

 “세리머니가 약한 것 같다”고 하자 숨겨둔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박인비는 “시즌 두 번째 메이저대회인 웨그먼스 LPGA 챔피언십에서 연장 끝에 우승하고는 너무 기뻐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연장을 치렀던) 카트리나 매튜와 눈이 마주쳐 손을 내리고 말았다”며 “US여자오픈 때는 (김)인경이가 멀리 있어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일부러 보여주려고 하지는 않지만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1위 부담 익숙해져야”=박인비는 US여자오픈 뒤 2개 대회에서 부진(?)했다. 매뉴라이프 파이낸셜 클래식(공동 14위)에 이어 마라톤클래식(공동 33위)에서 톱 10 진입에 실패했다. 어머니 김성자씨는 “인비가 마라톤클래식 때 도핑테스트 대상자로 걸렸다. 무더위에 땀을 많이 흘린 뒤 소변이 안 나와 테스트에 3시간이나 걸렸고 파김치가 됐다”고 했다.

 그러나 박인비는 부담은 피할 수 없는 거라는 것을 잘 안다. 박인비는 “세계랭킹 1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정말 힘든 자리인 것 같다. 하지만 부담이란 게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보니 익숙해지려고 한다”고 했다. 박인비는 8월 1일 개막하는 리코 브리티시여자오픈을 앞두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로 부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한 시즌 4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는 ‘캘린더 그랜드슬램’ 도전을 앞두고 스폰서 행사나 팬 사인회를 소화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박인비는 “아주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몸은 피곤해도 한국에 오면 재충전되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했다.

 ◆“행복한 골퍼가 되고 싶어요”=박인비는 올 시즌을 앞두고 1승을 목표로 잡았다. 지난해 상금왕과 최저타수상을 수상하며 올 시즌은 결과와 상관없이 행복한 골퍼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벌써 6승을 거두며 목표를 600% 달성했다. 박인비는 “올 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진 것 같다”고 웃었다.

 박인비는 “2008년 US여자오픈 우승 뒤 4년 동안 슬럼프를 겪으면서 명예의전당 같은 목표는 모두 버렸다”며 “오로지 행복하게 살자는 게 목표”라고 했다. 살인적인 일정과 시차로 인해 두통을 호소했던 박인비는 제주에서의 첫날 밤 좋아하는 대게찜도 많이 먹지 못했다. 둘째 날에도 삼겹살구이와 생선 등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일찍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딜 가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박인비는 “내 행복 공식은 단순하다. 가족이 화목하고, 주위 사람들이 나로 인해 즐거워지면 그게 행복”이라고 했다.

제주=이지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