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으로 끝난 '김종학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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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명장의 안타까운 몰락이다. ‘여명의 눈동자’(1991), ‘모래시계’(1995) 등으로 시대를 풍미한 김종학(62) PD. 영화 못잖은 완성도를 갖춘 TV드라마 시대를 연 스타 연출자다. 그가 23일 경기도 분당의 한 고시텔에서 쓸쓸한 최후를 택했다. 방송 현장에서 ‘독종’ ‘독사’라고 불렸던 그가 정글 같은 드라마 제작 현실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김 PD는 23일 오전 10시18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S고시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한 평 남짓한 방 안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화장실에는 타다 남은 번개탄 하나가 있었다. 창문·문 등 공기가 통할 수 있는 틈은 모두 청색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외부 침입도, 외상 흔적도 없었다. 분당경찰서 관계자는 “번개탄과 유서가 발견된 점으로 볼 때 자살로 추정된다”고 했다. 김 PD는 A4 용지 4장 분량의 유서를 남겼다.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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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PD는 최근 검찰 수사를 받으며 적잖은 압박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2부는 지난 17일 김 PD에 대해 사기·횡령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당초 19일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돼 있었으나 김 PD가 불출석했고, 23일로 심사가 다시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앞서 김 PD는 지난해 4월 중앙지검에 사기 및 강제집행면탈 혐의로 피소됐었다. 드라마 ‘태왕사신기’(2007) 세트장을 건설했던 시엔디21의 김모 대표가 “김 PD가 세트장 제작에 들어간 대여금·용역비 등 2억6500만원을 갚지 않았다”고 고소했다. 김 PD는 2008년 9월과 2011년 6월에 법원으로부터 지급명령 판결을 받았으나 “재산이 없다”며 대금 지급을 미뤄왔다.

　지난달부터는 경찰 수사도 병행됐다. 올 5월 드라마 ‘신의’에 출연한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배임 및 횡령 혐의)로 영등포경찰서에 피소됐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당초 2월에 제작사인 신의문화산업전문회사 대표 전모씨를 출연료 미지급 혐의로 고소했었다. 연출자인 김 PD가 운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그를 추가로 고소했다. 고소인단에는 김 PD의 조카인 연예기획사 대표 김모씨도 포함됐다.

　이들은 고소장에서 김 PD가 드라마 출연료·편집료·제작료 등 17억원을 미지급하고 20억원을 개인 용도로 횡령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지난달 차기작 구상차 중국에 머무르던 김 PD를 두 차례 소환 조사했다.

　김 PD는 지난해 9월 ‘신의’ 방영 당시 OST 이중계약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OST 계약을 먼저 맺었다는 엠스타미디어그룹은 이중계약을 했다 며 김 PD를 사기 혐의로 강남경찰서에 고소했다. 그러나 김 PD가 23일 사망함에 따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것으로 보인다.

　김 PD 자살 소식에 방송계는 충격에 빠졌다. 김 PD가 국내 드라마 산업의 성장과 팽창을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MBC 드라마 PD 출신인 김승수 서울예대 교수는 “늘 A급, 남들이 하지 않는 최고를 선보이고 싶어했다. 무모해 보일 정도의 완벽주의 성향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갈등을 빚어왔다. 치열한 경쟁, 방송사와 제작사 간 불공정 관계를 그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위원장 한영수)도 성명을 내고 “김종학 PD는 잘못된 외주제작 시스템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라고 밝혔다.

　스타연출가로서의 야심이 김 PD의 발목을 잡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그의 위기는 한류 스타 배용준을 캐스팅한 ‘태왕사신기’ 때 시작됐다. 수백억원의 제작비를 들였으나 시청률 부진을 면치 못했다. 작가만 여러 번 교체하며 준비해온 ‘신의’도 마찬가지였다. 편성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외 촬영을 감행하는 등 무리수가 제작비 손실로 이어졌다. 시청률·완성도 모두 좋지 않았다. 김 PD 빈소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양성희·민경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