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틴버겐|이희일(경기원 경제계획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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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설된 「노벨」경제학상의 첫 공동수상자 두 사람은 다같이 계량 경제학의 세계적 봉두로서 후진국 경제계획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때마침 우리나라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 입안 집행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면서 「틴버겐」교사의 강의를 직접 들었던 기획원의 이 경제기획국장과 서강대경제연구소에서 계량「모델」에 의한 장기계획 입안에 전념하는 김 교수의 글을 얻어 싣는다. 【편집자주】
「얀·틴버겐」하면 계량경제학이 금방 연상된다. 경제이론에 있어서 계량 경제학적 경기순환이론을 크게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경제계획방법에 커다란 공헌에 했으며 후진국의 경안제계획입에 많이 기여한 사람의 하나이다.
그는 또 가장 많이 순회강의를 한 사람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1963∼64연에 필자가 「네덜란드」사회연구소(Institute of Social Studies)에 있을 때 틴버겐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정상강의에서는 연구소의 교과목에 따라 경제발전에 관한 문제, 경제계획문제, 또는 계획모형 등에 관한 것이었지만 정상의의에도 특별강연회를 갖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나에게는 특별강연이 더욱 흥미 있었다.

<"비계량"에 주목>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전통적인 문제분야 보다도 그 당시로서는 좀더 색다른 분야에 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당시 후진국 개발을 위한 계획이론이나 계량모형만으로는 후진국의 개발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비계량적인 접근, 이를테면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에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후진국 개발에 있어서 교육이 미치는 영향 또는 그 중요성 그리고 사회적인 인습 및 가치관 등 종합적인 개발이 경제개발을 유도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틴버겐 스쿨"까지>
그는 그 당시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경제대학의 학장으로서 자주 이 연구소에 와서 강의를 했다.
백발이 성성하면서도 「스포츠·커트」한 머리는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이며 매우 다정스럽게 인자한 대화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1945년에 「네덜란드」의 「중앙계획국」의 초대국장을 지냈는데 하루는 「중앙계량국」을 방문했을 때 거기 간부들이 모두 「틴버겐」교수가 남겨 놓은 업적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을 듣고 매우 부럽게 생각했다.
「네덜란드」가 계량경제학 부분에서 비교적 앞선 것도 그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로테르담」경제대학을 그곳 학생들은 흔히 「틴버겐·스쿨」이라는 대명사로 표현한다.
하루는 「델프트」공과대학 학생을 만났는데 그는 그 당시 「틴버겐·스쿨」에서 1연 기간으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선택과목으로 경제학을 택했기 때문에 1년 동안 경제대학에 가서 경제학 과목을 복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교육의 폭이 매우 넓으면서도 전문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와 같은 교육의 넓은 폭이 「라이덴」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틴버겐」교류가 세계적인 경제학대가가 되고 「노벨」상까지 받게 된 근원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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