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큰손들 해외투자 기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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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에 투자를 해야겠으니 보유 채권을 전부 팔아달라. "

지난 13일 A증권사 채권팀 관계자는 70억원 정도를 굴리는 거액 투자자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그는 곧이어 투자 규모가 40억원에 이르는 투자자로부터 채권 환매요청을 받았다. 국내채권을 팔아 해외에 투자하겠다는 것이었다.

최근 국내에서 안정적인 자산에 투자하던 '큰손'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한 증권사 채권팀 관계자는 "국채나 정부보증채를 위주로 투자하던 사람들로부터 최근 해외투자에 대한 문의가 늘고 있다"면서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증권 전문가들은 큰손들이 북핵 문제와 불투명한 경제전망, 새 정부 출범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보다 안정적인 운용처를 찾아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여기에 국내의 저금리 기조도 해외투자를 부추기는 데 한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해외로 눈돌리는 큰손들=B증권사 채권팀 관계자는 "채권에 수십억원을 투자한 고객으로부터 '수익률도 낮고 나라가 여러가지로 불안한데 굳이 국내채권을 들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며 '북핵 문제가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면 바로 팔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이어 "대부분의 환매 상담자는 국내채권을 팔아 미국 국채 등을 사는 방안을 묻는다"고 설명했다.

특히 무디스사가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한 이후 큰손들의 불안감이 더 커진 것으로 알려졌다.

큰손들의 자금을 모아 수백억원 규모의 사모(私募)펀드를 운용하는 투자자문사들 역시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투자자문사 사장 K씨는 "국내에서는 도저히 수익률을 맞출 수 없어 동남아 지역 등에서 정부보증채나 외화표시채권에 투자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국내 대형 증권사 사장 H씨는 "거액 자산가들이 불안해 하는 것은 사실이다. 새 정부의 분배정책에 따라 세금부담이 늘어날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고 전했다.

◇기관투자가도 해외로=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M씨는 지난해 말 "한국에서 조성된 거액의 펀드가 현지에서 채권을 사려고 하는데 국책은행의 보증을 받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국내 금융기관 및 기업자금 등으로 조성된 펀드가 금리차를 노리고 해외 투자에 나선 것이다. 이 거래는 불발에 그쳤지만 국내 최대의 자금운용기관인 국민연금과 보험사 등은 올해 해외투자 규모를 크게 늘려잡고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올해 해외투자규모를 지난해보다 1조2천억원 많은 1조7천억원으로 늘릴 계획"이라며 "국내에서는 운용수익률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사들도 올 해외채권 투자 규모를 대폭 늘렸다. 삼성생명은 2조원, 교보생명은 6천억원, 대한생명은 3천억원을 연내에 해외에 투자할 계획이다.

◇자본유출 가능성은=국제금융정보센터 김창록 소장은 "시장에 불안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심각한 자본유출의 징후는 없다"고 말했다.

SK증권 리서치센터 오상훈 팀장은 "국내 주식이나 채권시장이 매력을 잃어 3백70조원의 부동자금이 갈 곳이 없어졌다"고 해외채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이유를 설명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자금의 이동이 수익률 때문이 아닌 불안감 때문이라면 불안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며 "정책에 대한 불안감 해소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송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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