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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은 옷 소재까지 간결화시킨 클리니즘"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이정선씨의 런던 작업실 한쪽 벽엔 컬렉션에 영감을 주는 사진들이 가득 붙어 있다. 실루엣의 단순함과 원단의 독특한 질감을 내세우는 그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도은 기자

런던패션위크를 주관하는 영국패션협회는 1년에 두 번, 컬렉션에 나설 신진 디자이너를 선발한다. 잠재력 있는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뉴 제너레이션(New Generation·이하 뉴젠)’ 프로그램이다. 한 시즌에 뽑히는 인원은 불과 10여 명 내외. 하지만 일단 그 안에 들면 든든한 후원을 받게된다. 전시 공간 또는 모델 등을 지원받는 것은 기본이고 후광 효과 역시 만만치 않다. ‘영국패션협회가 선정한’이라는 꼬리표 덕분에 세계 각국 바이어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홍보가 가장 큰 자산이 된다. 알렉산더 매퀸, 크리스토퍼 케인, 마리 카트란주 등 영국의 대표 디자이너들 역시 ‘뉴젠’ 출신이다.

2010년 가을, 이 ‘뉴젠’에 아시아인이 처음 뽑혔다. 바로 ‘J.JS.LEE’의 디자이너, 한국인 이정선(36)씨였다. 당시 그는 석사 과정을 막 끝낸 새내기였지만 런던 패션계엔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졸업 작품이 런던 최고의 백화점 해러즈가 선정하는 ‘최고의 디자인상’에 뽑혔기 때문이었다. 이 덕분에 50여 벌의 옷이 고스란히 해러즈 백화점에 걸렸다. 이후 각종 패션지에 작품이 실리기 시작했다. 패션지 ‘보그’의 유력 저널리스트 세라 무어가 “질 샌더의 뒤를 이을 미니멀리스트”라고 극찬하면서 관심은 더욱 증폭됐다. ‘뉴젠’이 탐낼 만한 디자이너로서 손색없었다.

이씨는 올해까지 4년째 ‘뉴젠’에 연거푸 선발됐다. 2011년엔 국내 패션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삼성패션디자인펀드’ 수상자로 선정돼 10만 달러(약 1억원)를 지원받기도 했다. 여세를 몰아 최근엔 이탈리아 보그가 선정한 ‘올해의 뉴 탤런트 디자이너’에 이름을 올렸다.

사업 역시 순항 중이다. 재킷은 150만~300만원, 스커트는 70만~80만원 정도로 가격대가 높지만 첫 컬렉션부터 세계적인 편집숍 ‘도버 스트리트’에 입점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는 ‘1도시 1매장’ 원칙을 고수하며 밀라노·도쿄·홍콩 등의 대표 편집 매장만 골라 독점 계약을 한다. 신진의 겁 없는 베팅 같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당신네만 팔게 해줄 테니 물량을 늘려라’고 하면 대부분 오케이해요. 이것이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비즈니스 전략이죠.”

같은 원칙을 한국에도 적용시켰다. 올 8월부터는 서울 청담동 대표 편집숍인 ‘무이무이’와 단독 거래를 텄다. 수입 브랜드만 취급해 온 이곳에서 먼저 연락을 해왔단다. “한국 브랜드가 아닌 한국인 디자이너 브랜드로 인정받은 것 같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J.JS LEE`의 2013 가을·겨울 컬렉션

디자이너 취직 힘들자 패턴사 택해
샛별로 떠오른 이씨도 처음부터 반짝이진 않았다. 96학번인 그가 졸업할 무렵 취업 시장은 깜깜했다. 외환위기의 암운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기업은커녕 중소기업에서도 수요는 드물었다. 월급 60만원 받는 인턴 자리 역시 쉽게 나지 않았다. 그나마 대다수 업체가 경비 절감을 위해 피팅 모델을 겸할 만한 신입을 원했다. 보통 키인 그가 뚫을 수 없는 벽이었다. 게다가 지방대 출신(충남대 의류학과)이었다.

우회로를 택했다. 옷의 본을 만드는 모델리스트(패턴사)에 지원해 대기업 신생 브랜드(코오롱 숙녀복 ‘쿠아’)에 들어갔다. 자격지심을 느낄 겨를도 없이 일을 배워 나갔다. “가르쳐 놓으면 시집갈 거 아니냐”는 사수들의 핀잔을 들으며 치마-바지-셔츠-재킷으로 난이도를 높여갔다. 코데즈컴바인에 이어 잭앤질까지 영캐주얼 브랜드로 회사도 옮겼다.

하지만 5년쯤 지나자 자괴감이 들었다. “똑같이 의상 배운 디자이너들보다 연봉도 낮고 뭣보다 디자이너와 모델리스트가 갑을이 되는 구조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돌파구로 찾은 것이 패턴 공모전. 거기에 몰두하며 잡념을 지웠다. 결과가 좋아 상을 받았고, 그 부상으로 세계적 패션스쿨인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으로 15주짜리 패턴 코스를 배우러 갔다.

인생 항로는 그때부터 달라졌다. 코스가 끝날 때쯤 학교에서 현지 취업을 알선해줬다. 이씨 역시 런던을 떠나기가 아쉬웠던 마음에 ‘아르바이트나 해볼까’ 정도로 가볍게 승낙했다. 하지만 석 달 계약기간이 끝나자 회사는 취업 비자를 만들어주겠다며 붙잡았다. 그렇게 2년 반을 런던에서 일하고 나서야 그는 꿈을 다시 발견했다. 진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바로 센트럴 세인트 마틴 석사 과정에 등록했다.

첫 학기부터 녹록지 않았다. 도움이 될 것 같던 경력은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 상업적인 디자인밖에 할 줄 모른다며 교수에게 늘 혼쭐이 났다. 교수는 ‘연필 잡고 디자인 하다 걸리면 넌 아웃’이라며 최후 통첩을 했다. 마네킹에 직접 원단을 걸치며 고쳐 나가는 방식만 허용했다. 이씨는 익숙지 않은 작업을 독하게 반복했고, 결국 단순한 실루엣과 디테일이라는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나갔다.

하지만 무리한 작업,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상은 건강에 이상 신호를 줬다. 졸업쇼를 두 달 앞둔 어느 날, 지병이었던 궤양성 대장염이 재발했다. 진료 예약 날짜를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학교를 관두기로 결심하고 귀국을 준비하던 중 그는 학교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다.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데가 없었는데 평소 호랑이 같던 지도교수와 친구들로부터 격려의 편지와 따뜻한 병문안이 이어졌다. 그 격려 덕에 이씨는 퇴원 뒤 졸업쇼를 포기하지 않고 끝냈다. “그때 쇼를 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저도 없겠죠.”

브랜드를 만드는 데도 주변의 도움이 컸다. 처음엔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패션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알았기에 졸업 직후부터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5개 럭셔리 브랜드에 원서를 냈고 셀린느와 스텔라 매카트니에 최종 합격했다.

하지만 지도 교수와 세라 무어가 그의 결정을 막았다. “서로 친구인 두 분이 취직 안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고요. 너는 그냥 네 옷을 만들라면서.” 그러면서 두 거물들은 아예 그가 들어갈 기업에 직접 연락을 취했다. “재키(이정선의 영어 이름)는 입사하지 않을 겁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이씨는 당시를 회고하며 “그때는 그냥 어른들 말씀을 거스를 수 없어 내 브랜드도 만들고 ‘뉴젠’도 신청했는데, 아마 저보다 그분들이 저를 더 잘 알고 있었나 보다”라며 웃었다.

파격·실험 대신 절제·단순미로 승부
이씨의 옷은 처음 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만하다. 런던 출신이 맞나 싶다. ‘파격’ ‘실험’을 내세우는 런던 패션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매끈한 실루엣과 장식을 생략한 옷이 대다수다.

‘반전의 충격’을 준 이씨의 디자인은 대신 약점이 많다. 실루엣으로만 승부하다 보니 재봉이 조금만 뒤틀려도 완성도가 확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모든 옷을 스튜디오에서 자체 제작하기로 했다. “옷은 겉만큼 안감 처리를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밖에서 대량으로 만들면 그게 망가질 수밖에 없죠.”

일일이 손으로 단처리를 하고, 옷마다 직접 자수 넣고 단추 다는 일은 예사다. 그는 “거의 쿠튀리에(고급 맞춤복 디자이너)라고 보면 된다”며 “수작업이 많아 한 시즌에 모두 합쳐야 500벌을 넘지 못한다”고 말했다.

더 중요한 과제는 따로 있다. 패션을 조금만 아는 이라도 ‘미니멀’하면 누구나 셀린느나 질 샌더라는 브랜드를 떠올린다. 그만큼 기존의 벽이 단단하다는 얘기다. 그들과의 차별화는 이씨가 옷을 만들며 내내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단순히 질 샌더·셀린느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사람들은 옷이 단순하거나 흰색·검은색이면 다 미니멀이라고도 하니까. 그 모든 것과 제 옷을 어떻게 구분하는지가 진짜 숙제죠.”

그는 이를 위해 새로운 원단 개발에 가장 중점을 둔다. 기존 원단에 새로운 기술을 접목시킴으로써 해법을 찾는다. 가령 칼라 부분에 직접 칼라를 다는 게 아니라 엠보싱 처리로 볼록 튀어나오게 만들어 착시 효과를 주는 식이다. 바늘 펀칭으로 원단을 변형해 쓰기도 하고, 프린트 역시 ‘찍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원단을 처리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걸 미니멀리즘이라고 말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다르죠. 소재까지 모두 간결화시킨 ‘클리니즘(cleanism)’이라고 하고 싶어요.”

“향후 10년 목표는 무조건 버티는 것”
디자이너 4년차에 불과한 이씨지만 궁극적 목표는 선배들과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 글로벌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안나 수이(중국)·지미 추(싱가포르)처럼 아직 대외적으로 패션 수준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도 하나씩 있는 글로벌 브랜드가 없다는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그래서 10년 후 목표를 물었을 때 그는 “버티는 것”이라고 간단히 답했다. 신진 디자이너가 컬렉션 한 번만 하면 수천만원씩 적자를 내는 건 당연지사. 더구나 그는 판매업체가 결제를 늦추면서 원단 거래처에서 독촉장이 날아들고 법정출두 요청서까지 받은 적도 있다. 브랜드를 접을 뻔했던 아찔한 경험이었다.

그래도 일단 지금은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는 결심을 세웠다. 우영미·정욱준 디자이너가 파리에 진출해 뚝심 있게 버텨내며 조금씩 유럽에서 인정받는 것처럼 자신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가족들과도 10년간은 귀국 종용이나 사업 포기를 하지 말라는 데 ‘합의’를 봤다.

“어떤 결론이 날지 모르죠. 하지만 그걸 모르니까 가보자는 거예요. 어느 정도 정착했다 싶기만 하면 더 버틸 거고요. 셀린느고 질 샌더고 처음부터 명품은 아니었잖아요.”

이씨는 자신이 포기하면 누군가 또 이만큼 올 때까지 새로 시작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강한 자가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 꼭 그를 두고 하는 말일 터다.

런던=이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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