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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살림살이도 여성이 잘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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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아,아,동민여러분 안녕하십니꺼.면사무소에서 알리는 말씀입니다.수시분 종합토지세와 정기분 면허세를 체납하신 분은 이달말까지 납부해 주시기 바랍니다.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경남 합천군 농촌마을 확성기에서 울려 나오는 이장의 목소리가 걸쭉한 50∼60대 남성이 아닌 곳이 많다.

합천군내 여성이장이 3백66개 마을 중 13%인 49명으로 전국 군(郡)에서 가장 많기 때문이다.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한 합천군내 농촌마을 확성기 목소리는 올들어 구수하면서 가느다란 아줌마들의 차지가 돼 가고 있다.

군은 지난해부터 특수시책으로 여성이장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이러한 시책에 힘입어 지난해까지 1명이던 여성이장은 올들어 이장선거가 있는 마을을 중심으로 크게 불어난 것이다.여기에다 매달 3∼4개 마을에서 이장을 새로 뽑고 있어 여성이장의 비율은 앞으로 자꾸 늘어날 전망이다.지금까지 선출된 여성이장들은 30세 주부부터 66세 할머니 까지 다양하다.

군이 여성이장을 뽑는 마을에 사업비 3천만원과 자녀들의 학자금을 지원하고 산업시찰도 시켜주는 등 다양한 혜택을 주는 것도 여성이장 확대에 한몫을 차지한다.

합천군이 여성이장 비율을 늘리려는 것은 농촌지역 고령화로 혼자사는 노인들이 늘면서 여성의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아줌마 이장들은 특유의 섬세함과 친화력을 무기로 맹활약하고 있다.

지난 14일 오전 합천군 율곡면 사무소 2층 회의실.26개 마을이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장회의를 하고 있었다.이곳의 여성이장은 합천군내서 가장 많은 8명.

이날 회의에서 여성이장들이 발언과 질문을 많이 해 눈길을 끌었다.

회의가 끝난뒤에도 문영자(54·기리)이장은 수해피해복구비 신청을 위해 찍은 사진을 찾아가려고 담당공무원 책상서랍을 뒤지는 등 대부분의 여성이장들이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느라 담당공무원들과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문재학 율곡면장(59)은 “주민들에게 친절하고 업무를 곰곰히 챙겨 반응이 좋다”라며 “민원을 해결하느라 면사무소를 자주 찾아와 귀찮게 하는 여성이장들이 많다”라고 소개했다.

유문옥(49·문림2구)이장은 율곡면사무소에서 마당발로 소문이 나있다.

지난해 수해때 무너진 마을안길을 포장해 달라고 몇차례 건의했으나 받아 들이지 않자 기어코 문면장에게 현장을 보여준 다음 사업비 1천만원을 약속받았다.

남편과 함께 1천여평의 농사를 짓는 그녀는 구멍가게를 하면서 1남3녀를 모두 대학공부 시킬 만큼 적극적이다.이장을 맡기전에도 새마을지도자와 적십자봉사대 활동을 14년이나 했다.

유이장은 “면사무소를 뛰어다니면서 주민들의 어려움을 하나씩 해결할때마다 사는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마을 곳곳을 다니기 위해 필요한 이동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자전거를 배우는 아줌마 이장들도 있다.율곡면의 나옥희(50·갑산1구)이장은 지난달 이장으로 뽑힌 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걸어 다니려니 너무 힘들어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기에 적당한 자전거 타는법을 배우느라 수십번 넘어졌다”라며 시퍼렇게 멍던 다리를 보여줬다.

운전을 할 줄 아는 여성이장의 활약은 눈부시다.헌옷·재활용품 수거때나 비료를 나눠줄 때 트럭을 몰고 나타나는 여성이장들은 남자이장들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여성이장중 가장 젊은 최경아(30·봉산면 권빈3구)이장은 “마을 어른들이 조심스럽지만 며느리처럼 생각하고 잘 도와주신다”라고 말했다.

혼자사는 노인들은 여성이장들을 반긴다.건성으로 둘러보는 남자이장들 보다 자원봉사자들을 연결해 불편한 점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남자이장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다. 23년째 이장을 맡고 있는 율곡면 정현기 이장단장(53)은 “회의 분위기가 좋아지고 적극적인 여성이장들을 보면서 많이 배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성이장들에게 걱정거리도 있다.

초상이 나거나 힘을 써야하는 마을의 큰일을 치를 때 한계를 느낀다.바깥일을 하느라 집안일과 남편을 제대로 못챙길 때도 미안하다고 한다.

그럴때마다 남편의 외조가 큰 도움이 된다.

한 여성이장은 “남편이 소외감을 느낄까봐 조심스러워 힘이 필요한 일은 주로 남편에게 부탁한다”라고 말했다.

마을 큰일은 여성이장들의 뛰어난 주민 동원력으로 많이 커버되고 있다.남자이장들이 부탁할 때 보다 여성이장들의 애교섞인 공세가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심의조 합천군수는 “갈수록 높아지는 여성의 사회역할을 농촌에 반영하기 위해 여성이장 비율을 30%까지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합천=김상진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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