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7번방의 선물'은 말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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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규연
논설위원

26억3000만원. 법원이 미성년자 강간살해라는 추악한 죄명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정원섭(79)씨와 그 가족에게 국가가 물어주라고 판결한 액수다. 시국사건·사법살인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으로는 비교적 큰 배상 규모다. 하지만 국가기관이 가한 어처구니없는 인권유린과 더러운 오명 속에 살아야 했던 정씨 일가의 고초에 비하면 100억원이라도 시원치 않다. 정씨의 사연은 영화 ‘7번방의 선물’의 모티브가 될 만큼 황당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모든 비극은 1972년 9월 말 춘천의 논둑에서 시작된다. 파출소장의 어린 딸이 숨진 채 발견된다. 인근에서 만화가게를 하던 정씨는 1차 조사를 받는다. 시신에서 발견된 체모(體毛) 등이 정씨 것이 아니어서 당연히 풀려난다. 이후 내무장관이 “10월 10일까지 범인을 못 잡으면 각오하라”고 날짜를 못박으면서 분위기가 돌변한다. 경찰은 정씨를 다시 체포해 범인으로 몬다. 증거를 조작하고 목격자를 위협해 거짓증언을 유도한다. 정씨에게 가혹한 고문도 가한다. 심지어 정씨의 아들까지 증거수집에 활용한다.

 결국 15년간 옥살이를 하고 모범수로 나온 정씨는 2009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를 근거로 민사소송을 해 배상판결을 받은 것이다. 사법부·경찰의 검은 과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만큼이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곳은 언론이다. 전북 남원에서 목사로 활동 중인 정씨는 당시 언론의 행태를 이렇게 회고한다.

 “체포되자마자 내 주장을 펼 틈도 주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서야 했습니다. 여러 신문에 내 얼굴·이름이 나와 아내는 맨몸으로 아이를 데리고 허겁지겁 고향을 떠났지요. 언론은 내 얘기에는 철저히 눈을 감고 귀와 입을 막았습니다. 경찰 얘기만 쓰더군요.”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인격을 말살한 선정 보도였다고 정씨는 말한다. “나를 변태성욕자·성도착자로 규정하더군요. 다른 어린애도 건드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기사도 나왔어요. 아버님이 보도를 보고 충격을 받아 몇 달 뒤 돌아가셨어요.”

 1972년 10월 10일자 일간지들을 찾아봤다. 정씨의 검거 소식을 사회면의 주요 기사로 처리했다. 11일자에는 수사 발표를, 12일자에는 정씨의 구속 소식을 비중 있게 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정씨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미디어는 없었다. 실명·나이·주소지까지 세세히 적으면서도 정씨의 목소리는 한 줄도 넣지 않았다.

 언론은 당연히 의심을 가져야 할 대목에도 눈을 감았다. 정씨가 구속되고 몇 달 뒤 괴이한 경찰 발표가 있었다. 재판에서 정씨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 농부를 위증죄로 구속했다는 내용이었다. 억울한 피해자가 또 나왔는데도 언론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정씨는 공판 과정에서 경찰이 고문한 사실도 폭로했다. 극소수 신문만 사회면 구석에 단신 처리하고 지나갔다. 세월이 흘러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법원에 정씨 사건의 재심을 권고했을 때도 언론은 가볍게 처리하거나 묵살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체포·구속 때 호들갑을 떨다가도 이후에는 무죄를 받건 말건 무신경한 우리 언론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72년 겨울, 경찰관들은 정씨 검거의 ‘공로’를 인정받아 특진했다. 지금은 모두 현직에서 물러났다. 고문·증거조작의 공소시효도 지났다. 책임을 물을 곳이 없는 과오가 된 것이다. 정씨는 자신에게 지급될 배상금이 국민세금에서 나오는 게 못내 아쉽다고 했다. 과오를 저지른 공직자에게 징벌적 손해배상과 함께 구상권 청구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정씨는 언론이 요즘에도 인권·반론권을 무시하고 진실 확인에 소홀한 모습을 보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 같아 가슴이 내려앉는다고 했다. 정씨는 언론에 한 가지만 당부한다고 했다. “제발, 한쪽 말만 듣지 마세요. 그게 국가기관이라도.”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