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 털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가로수길에서 ‘가로수뒷길’로 … .

친구들은 ‘사장님’이라 부르지만 정작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가로수길이 뜨면서 2000만원이던 보증금은 4000만원으로, 220만원이던 월세는 500만원으로 뛰었다. 그 후 한 1년은 버텨봤는데 빚만 쌓여 두 골목쯤 안쪽으로 옮겼다. 이후부턴 손님도 확 줄고 수익도 거의 없다.”
- 서울 신사동 커피집 사장 김민주(41·여)씨

‘한 해 100만 개 이상이 새로 문을 열고 그 뒤편에선 80만 개 이상이 폐업에 내몰리고….’ 1000만 명 이상의 종사자가 몰려있는 국내 자영업의 현주소다. 자영업은 공급 과잉으로 극심한 경쟁에 내몰려 레드오션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 보니 한 달에 100만원의 수익을 내지 못하는 자영업자가 절반을 넘는다. 수익은커녕 네 명 중 한 명은 적자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본지가 4월부터 골목상권의 경쟁력을 높이자는 취지로 시작한 ‘강소상인 시리즈’ 11회째를 맞아 국내 자영업자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40%만 남의 돈 빌리지 않고 문 열어

 소상공인진흥원에 따르면 전체 자영업자 중 57%가 김씨처럼 월 수익이 채 100만원이 안 되는 저수익 구조에 갇혀 있다. 또 자영업자의 상당수는 전체 국민 중 소득하위 20% 이하에 해당하는 생계형 자영업자로 추락하고 있다. 특히 경쟁이 심한 음식·숙박·이미용·도소매업 등에 사양길에 접어들었거나 적자를 면하지 못하는 생계형 자영업자가 몰려 있다.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더라도 국내 자영업자 비중(29%)은 미국(7%), 일본(12.3%), 독일(11.6%) 같은 선진국과 비교하면 두세 배나 많다. 그만큼 공급이 과잉 상태라는 얘기다. 현재 국내 자영업의 생태계를 요약하면 사업 부진→부채 증가→ 폐업→신규 자영업 재진입→과잉 공급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악순환 구조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선빈 수석연구원은 “국내 자영업자는 우리와 1인당 국민소득이 비슷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인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보다 약 229만 명이나 더 많다”며 “소득이 불안정한 자영업자가 많다는 건 결국 국가 경제가 취약하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한 해 100만 개 이상의 자영업이 창업되지만 이들 중 과반수(60%)는 준비 기간이 채 6개월이 안 된다. 1년 이상 꼼꼼한 준비 기간을 거친 창업자는 네 명 중 한 명에 불과하다. 창업비용은 평균 6570만원이 들지만 창업자 절반 이상은 이 돈을 은행·친구·친척 등에게 빌려 조달한다. 사채나 카드대출을 끌어다 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영업소는 도로변이나 주택가, 아파트 상가 등으로 몰린다. 상권이 활발한 역세권·시내상권 등은 높은 임대료 때문에 넘보지 못한다. 그렇다보니 태생부터 매출이나 수익구조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자영업자의 절반 이상(58%)은 한 달 매출이 400만원이 안 된다. 매출액 중 임대료나 인건비, 원재료 등을 제외하고 손에 남는 수익이 월 100만원이 안 되는 자영업자가 절반을 넘는 이유다. 그나마 4명 중 한 명(27%)은 적자다. 적지 않은 자영업자들의 “내 월급도 못 건진다”는 푸념이 빈말이 아닌 셈이다. 여기에 전문가들은 “월급을 받지 않고 남편이나 부모 가게에서 일하는 무급가족봉사자까지 감안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1년 이상 준비한 개업은 4명 중 1명뿐

 그런데도 최근엔 30~40대 중에 자영업 창업이 늘고 있다. 특히 1~2년 전부터는 직장에서 은퇴한 50대 초·중반의 베이비부머들까지 몰리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이들이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안정된 일자리가 그만큼 적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민주씨 역시 ‘월급 받으며 직장 다니면 속 편하고 얼마나 좋겠느냐”며 “일자리를 못 구하니 옷가게나 커피집 같은 걸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자영업자 중에 고졸 이하(77%)가 많은 것도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정근 수석연구원은 “전반적으로 사회적 취약계층이 자영업종으로 몰리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당국이 ‘묻지마 창업’을 권하는 정책보다는 한계 상황에 내몰리는 자영업자가 줄어들 수 있도록 안전망을 갖추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자영업자들의 활로를 찾아줄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삼성경제연구소는 지식서비스 등으로 자영업종을 다변화하고, 은퇴한 베이비부머들의 자영업 진입을 조절해야 하며, 생계형 자영업자의 재기를 촉진할 수 있는 체계적인 서민금융지원 등의 대책을 제시했다. 김선빈 수석연구원은 “자영업 종사자 비중이 OECD 평균 수준을 밑도는 금융·가사·사업지원 서비스 등 선진국형 서비스 자영업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현재 자영업이 소규모 위주여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만큼 비슷한 업종의 자영업자들을 묶어 협동조합 형태로 조직화한 뒤 중소기업에 준하는 지원을 해주는 방안도 거론된다. 자영업자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최근 늘고 있는 은퇴한 베이비부머들이 자영업으로 몰리는 걸 막을 필요도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공공도서관의 독서지도사나 사서, 남성 간병인 등 장년층 남성이 일하기에 알맞은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기존의 생계형 자영업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재기를 촉진할 수 있도록 정책자금과 서민금융의 접근성도 높여야 한다. 이미 한계상황에 처한 자영업자들이 자영업을 털고 나올 수 있는 업종전환이나 직업훈련 같은 교육도 중요하다.

장정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