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치우고 제습기를 놔야 할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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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호 20면

더운 여름과 함께 장마가 시작됐다. 필자는 가습기를 보자기에 싸서 창고에 집어넣고 제습기를 꺼내 설치하는 것으로 여름 준비를 한다. 습기를 뿜어내던 가습기가 자리에 놓여 있던 게 불과 한 달 전인데 이젠 반대로 습기를 빨아들이고 있으니 사람은 참 간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면 적응해야 하니 어쩌겠는가.

증시 고수에게 듣는다

날씨만큼이나 금융시장의 환경도 한 달 사이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미국이 경기 회복의 징후가 보인다는 이유로 그동안 시행해 왔던 양적완화를 점진적으로 거두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했던 모든 환경이 바뀜을 의미한다. 역시 이번에도 금융시장은 빨랐다. 새로운 환경 변화에 맞춰 모든 자산들은 급한 가격 조정을 겪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많은 투자자의 패러다임은 환경 변화에 맞게끔 조정되지 못하는 거 같다. 장마가 왔는데도 가습기를 치워버리지 못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가습기를 방치하면 눅눅한 방에서 자야 하는 불편함 정도가 있을 뿐이지만 투자에 있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잘못된 의사 결정의 원인이 되고 이는 결국 투자 손실로 이어진다. 소중한 내 돈을 지키기 위해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빠르게 이동해야 한다.

금융시장 변화에 맞게 투자도 달라져야
우선 채권의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금융위기 이후 채권은 이자는 간식에 불과할 정도로 채권 투자자들에게 시세차익을 안겨줬다. 경기를 살리기 위한 조치로 금리가 줄곧 빠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채권은 곧 불패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양적완화의 종언으로 이제 금리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 만기까지 보유할 생각이 아니라면 채권은 더 이상 안전자산이 아니다.

일러스트 강일구

물론 이것이 주식시장의 부흥을 의미하진 않는다. 돈은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으로 튀어나오는 풍선처럼 단순하게 흐르지 않는다. 돈에는 눈이 달려있어서 될 만한 곳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국 주식시장의 온도 차이도 극명하게 갈릴 전망이다. 벌써부터 미국시장은 금세 회복을 보였지만 신흥시장은 지지부진한 흐름을 이어가는 모습이 목격된다. 이는 분명 한국시장에 부정적인 소식이다.

미국은 금융위기를 일으킨 주범으로, 달러를 무한정 찍어내는 불량국가로, 제조업이 사라져 실질적인 성장이 멈춰버린 경제권 취급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달러 약세가 그 증거였다. 그 대안으로 지목된 국가가 바로 중국이었다. 지난 몇 년간 시장은 중국 비중이 큰 기업들에 높은 가격을 부여했고 그 결과 투자자들은 중국 성장의 수혜를 받는 주식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지금부턴 반대의 상황이 펼쳐질 전망이다. 얼마 전 우리 회사의 애널리스트가 한 종목을 추천하면서 매력 포인트로 중국 비중이 낮다는 점을 어필했는데 예전 같으면 헛웃음이 터져 나왔겠으나 이제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 현실이다. 중국 비중이 큰 기업이 아니라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하거나 달러 자산을 보유한 기업을 찾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달러 강세의 도래와 중국 경제의 성장 둔화는 결국 원자재 가격의 하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과거엔 원자재가 갑이고 원자재를 쓰는 기업은 을이었지만 이제는 생산시설과 고객을 보유하면서 원자재를 써주는 기업이 갑이다. 원자재 가격 상승이 늘 리스크로 지적됐던 음식료와 타이어 주식이 최근 하락장에서 선방한 배경이다. 공급과잉까지 걸린 원자재의 가격 회복에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미국에 자회사 둔 회사, 저가매수 추천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식시장을 바라보자. 다행히 우리나라 주식시장엔 1800개의 다채로운 선택지가 있다. 부채가 많은 기업도 있는가 하면 현금이 많은 기업도 있고, 중국 비중이 큰 기업이 있는 반면 미국 비중이 큰 기업도 있고, 원자재를 생산하는 기업도 있지만 원자재를 사용하는 기업도 있다. 새로운 환경에 잘 맞는 종목을 잘 고르면 될 일이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주식투자의 매력이다.

문제는 가격인데 여기에도 추가적인 기회가 있다. 다행히 시장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까진 기존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기업들의 주가가 여전히 낮게 거래되는 경향이 있는 탓이다. 미국에 본거지를 두고 있어 현지 경기 회복의 수혜를 보고 있는 자회사를 둔 동원산업(미국 1위 참치 캔 회사 스타키스트 보유)와 휠라코리아(미국 1위 골프공 회사 아쿠쉬네트 보유)는 본격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 가치투자의 관점에선 한 번의 기회가 더 포착될 수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싸잡아 버려지는 주식들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 비중이 크다 하더라도 자동차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자동차 보급은 중국 경기 둔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 한국의 완성차 및 부품업체가 보유하고 있는 중국 자회사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이들 주가가 빠진다면 저가매수를 해볼 만하다.

이제 금융위기 이후의 수습 과정이라는 한 단원의 막이 내리고 있다. 변화는 기회다. 그리고 그 기회는 변화를 준비한 투자자에게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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