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노래, 5억 쓰면 20위권 … 음원 사재기 의혹 사실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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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기성 가수 3억원, 신인은 5억원-. 국내 1위 음원 사이트에서 4~5일간 차트 20위를 유지하는 데 드는 ‘음원 사재기’ 비용이다. 가요계의 ‘공공연한 비밀’로 통하던 음원 사재기의 윤곽이 드러났다.

 중앙일보 자매지인 일간스포츠는 12일 한 대형 음원 유통사가 작성한 ‘음원 사재기 대응 계획’ 내부 문건을 입수해 보도했다. 음원 사재기에 관한 소문의 실태를 조사하고 대응 방안을 담은 보고서다. 보도에 따르면 음원 사재기 수법은 상도덕을 해치는 차원을 넘어 범죄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책에 이어 음반에도 사재기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입소문 마케팅 업체가 대행=문건에 따르면 음원 사재기 는 바이럴 마케팅(Viral Marketing) 업체 3~5곳이 대행하고 있다. 입소문을 관리한다는 이들 업체는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이슈를 밀어 넣는다거나, 불리한 댓글을 지워주는 등의 일을 주로 해왔다. 그런데 이제 ‘음원 사재기’까지 영역을 확대한 셈이다.

 음원 사재기는 음반 시장이 무너지고 디지털 음원 시장이 가요계를 주도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온라인 음악 사이트의 아이디만 여러 개 확보하면 월정액 상품에 가입해 무제한 스트리밍(실시간 재생)으로 순위를 높일 수 있어 음반 사재기에 비해 조작이 월등히 쉽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가요 관계자는 “업계에선 음원 차트 10위 중 적어도 5개 팀은 사재기를 한다고 본다. 대중은 군중심리에 따라 상위권 곡을 듣고, 온라인 미디어는 ‘음원 차트 올킬’ 등의 기사를 쏟아내 사재기한 곡이 다시 주목받는 악순환이 이뤄진다. 정당하게 경쟁하는 창작자의 음악은 사장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바이럴 업체로부터 음원 사재기 제안을 받았지만 뮤지션들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힐 수 없어 거절했다”며 “심지어 메이저 가요기획사조차 사재기에 연루됐다는 정보를 입수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한 아이디로 하루 1만 번 스트리밍=바이럴 마케팅 업체의 음원 사재기 기본 수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음악 사이트에서 다수의 ID를 확보한 뒤 음원 스트리밍 이용권을 매입해 특정 곡을 집중적으로 재생한다. 고의로 음원을 수천 번 반복 재생하는 ‘어뷰징(abusing)’ 기법이다. 한 곡이 평균 3분이라 가정하면 한 아이디로 하루 약 480번을 들을 수 있다.

 보통 곡당 1분 이상을 들어야 1회 재생이 인정된다. 1분씩만 듣는다 해도 하루 최대 1440번이 한계다. 하지만 문건에 따르면 특정 곡을 하루 평균 1만 번 넘게 재생하는 아이디도 발견됐다. 이 같은 조작에는 자동으로 60초씩만 반복 재생되게 하는 ‘자동 마르코 시스템’, 또 한 아이디로 여러 대의 기기에서 불법적으로 동시 접속할 수 있게 하는 ‘디바이스 이뮬레이터’ 등의 프로그램이 동원된다.

 ◆꿩 먹고 알 먹는 사재기 유혹=올 초까지만 해도 음원 사재기는 ‘마중물 붓기’ 같은 투자개념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난 5월 온라인 음악 저작권 징수 규정이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기존엔 특정 곡이 온라인 음악 서비스업체 한 달 전체 스트리밍 횟수의 몇%를 차지했느냐를 기준으로 저작권리자에게 돈을 배분했다.

 하지만 개정 이후 소비자가 한 번 들을 때마다 3.6원을 받도록 변경됐다. 가요기획사가 6000원에 월정액권을 구입해 하루 1만 번 스트리밍을 하면 저작권·저작인접권 등으로 한 달에 108만원을 회수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편법과 범법의 유혹이 더 강렬해진 셈이다.

 한 온라인 음악 서비스업체 관계자는 “차트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데다 저작권료 부담이 기형적으로 느는 등 부작용이 크다”며 “한 곡을 끝까지 다 들어야만 1회 재생으로 셈하도록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산업과 김지희 사무관은 “비정상적인 스트리밍으로 인한 조작에 대해선 문화부가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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