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사는 한국인 핏줄 '코피노' 빈곤 대물림 끊고 그 얼굴에 햇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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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앙헬레스 동방사회복지회 무궁화센터 개원식에 참가한 최선영(왼쪽)·목진혁씨 부부. 지난 5월 23일 문을 연 무궁화센터는 코피노 가정의 자활을 돕는다. [사진 코이카]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관광도시 앙헬레스. 지난달 29일 동방사회복지회 앙헬레스 지부에 걸음마하는 유아부터 고교생까지 10여 명이 모였다. 흔히 ‘코피노’라 불리는, 한국계 아버지와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이날은 월 1회 모자가 함께 참석하는 ‘코피노 가정 자활모임’의 날. 모임이 끝나자 아이들은 최선영(44) 동방사회복지회 자문위원에게 다가가 “띠따”(이모)라 부르며 인사했다. 최씨는 아이들 한 명 한 명 살갑게 안아주며 “한국인 핏줄을 타고 난 이 아이들이 내겐 친자식만큼이나 귀한 생명들”이라고 말했다.

 1996년 남편 목진혁(48)씨의 사업차 필리핀에 이주한 최씨가 코피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06년 무렵. 코피노 실태 취재를 온 방송사에 교민으로서 도움을 준 게 계기다.

“대부분 아버지 없이 딱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외면하기 어려웠다. 부부가 합심해 2009년부터 인근 교회 건물에서 주 1회 모자 자활 모임을 열었다. 아이들에게 위생 보건 교육을 하는 한편 주로 성매매 업종에 종사하는 코피노 어머니들에게 일자리 전환을 권유했다. 딸 은솔(18), 아들 찬수(15)도 코피노들에게 피아노·드럼을 가르치는 등 힘을 보탰다.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목씨 수입을 쪼개고, 개인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정기모임을 꾸려왔다.

 2011년 말 동방사회복지회가 이들의 활동을 접하고 지역 사업으로 흡수했다. 이때부터 평일 놀이방 및 방과후 학교가 진행됐다. 올해부턴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 지원 사업(공식명칭 ‘무궁화센터’)에 포함돼 연 2000만원의 예산 지원을 받는다. 5월 23일 정식으로 문을 연 무궁화센터엔 코피노 40명 외에 지역 빈민아동 40명 등 80명이 등록해 혜택을 받고 있다. 센터는 코피노로 앙헬레스 의대에 재학 중인 이창도(19)군 등에게 장학금도 지원한다. 이날 모임에 처음 참석했다는 세 자녀의 엄마 그레이스(39)는 “아이들 교육이 막막했는데 희망을 발견해서 기쁘다”고 했다.

  필리핀의 전체 관광객 중 한국인 비율은 23.6%(2011년 기준). 가장 높은 비율이다. 코피노의 상당수는 한국인 관광객·사업가가 필리핀 여성과 일시적으로 교제해 낳은 아이들이다. 피임을 금기시하고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필리핀 사회의 특성도 코피노 증가에 한몫한다는 분석이다.

목씨는 “2006년 수십 명이던 앙헬레스 코피노가 지금은 1000여 명을 헤아릴 정도로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2년 기준 필리핀 전역에 2만 명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책임지지 않고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씨는 “코피노 가정이 빈곤을 대물림하는 문제가 있는데, 여러 기관의 도움으로 최소한의 구제 체계를 갖추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류관수 동방사회복지회 앙헬레스 지부장은 “코피노 가정이 받은 상처를 우리가 먼저 껴안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JTBC는 한국인 원정 성매매와 코피노의 실태를 12일 밤 11시 ‘탐사코드J’를 통해 집중 보도한다.

앙헬레스=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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