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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순혈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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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226년 망망대해를 떠돌던 베트남인이 황해도 옹진반도의 화산(花山)에 상륙했다. 쩐(陳) 왕조에 권력을 빼앗긴 베트남 리(李) 왕조의 둘째 왕자 이용상(李龍祥)이었다. 필담(筆談)으로 이 왕자의 신분을 알게 된 고려 조정은 그를 화산군으로 봉했다. 화산 이씨의 출발이다. 베트남에선 매년 음력 3월 15일에 리 왕조의 종묘 제례를 지낸다. 멸족한 줄 알았던 리 왕조의 후손이 한국에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된 베트남 정부는 1995년 제례 때 화산 이씨 종친회장을 제주(祭主)로 초청했다. 베트남 말을 모르는 종친회장은 한국말로 제문을 읽고 베트남인이 통역을 했다고 한다.

한국인은 단일민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원류는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뉜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북방계는 다리가 길지만 상체가 다소 왜소해 보이고 손이 짧다. 남방계는 손이 길고 상체가 발달했지만 다리가 짧아 안짱다리처럼 보인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북방계를, 박태준 전 국무총리는 남방계를 대표하는 모습으로 꼽힌다.

성씨를 놓고 봐도 한국인은 '순혈(純血) 민족'이 아니다.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 공주였다고 전해진다. 기록상 한반도 최초의 국제결혼인 셈이다. 수로왕은 아들 중 일부에게 왕비의 성을 붙여줬다. 그 후손들이 허씨다. 또 우리나라 250여 성씨 중 130여 성씨가 중국에서 온 귀화 성씨다. 상주(尙州) 이씨인 기자의 족보도 시조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밝히고 있다. 화산 이씨뿐 아니라 덕수 장씨(아랍계), 연안 인씨(몽골계), 경주 설씨(위구르계) 등 중국 외의 귀화 성씨도 적지 않다. 최근 귀화한 로버트 할리는 영도(影島) 하(河)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난해 결혼한 아홉 쌍 중 한 쌍이 외국인과 결혼했다. 외국 여자와 결혼한 한국 남자가 2만5594명, 외국 남자와 결혼한 한국 여자가 9553명이다. 블랑카로 대표되는 외국인 근로자도 수십만 명이다. 우리 사회의 고령화 속도를 고려하면 외국인 근로자는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 순혈주의에서 벗어나 한민족의 범위를 넓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이세정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