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배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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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을 왕복하면서 처음에는 우연히, 나중에는 자원해서 뱃길올 택했더니 두 번 왕복하는 사이에 태평양을 네번이나 횡단한 셈이다. 선실의 답답합을 면하기 위하여 갑판에 나와있는 시간을 연장하고 보니 상대할 것은 물밖에 없고 따라서 물과의 한없는 대화를 가져보기도 했다. 대화라기 보다는 물이 주는 다정한 위로와 엄숙한 교훈에 잠져서 나를잊고 도취하곤 했다.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를 내다보고 서 있노라면 인간의 사소한 번뇌가 어디론지 사라지고 마치 어머니 품에안긴 어린이 마음모양 평온해짐을 느끼면서 조용히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에 감사하며 미래를 행해 꿈꾸는 심정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물의 생김새에 대해서 자연 많이 생각하게 되는 가운데 배운점도 적지않다. 물은 무색·무형·무취하지만 지극히 능소능대하여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여행한다. 물은 색이 없으니 비치는 것의 색을 그대로 드러내어 주며 모양이 없으니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며 내음이 없으니 용해된 물질의 내음을 그대로 발산한다. 나도 물의 성품을 닮고싶다. 그러면 아집과 자만과 욕심을 완전히 버린 무아지경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물은 열을 가하면 소리없이 증발하여 사라지되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높온 곳에서 현대를 탈피하였다가 마시금 지상으로 돌아온다. 옛날에 구슬을 훔쳤다는 혐의를 받은 한 나그네가 기둥에 묶인채 하룻밤을 지새우며 이튿날 거위똥에서 구슬이 나을때까지 기다림으로써 거위의 희생도 막고 자기의 결백성도 증명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람도 억울하다고 속히 고발하는 경박성보다는 물과같이 높은 차원에 머무르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아량을 갖고싶다.
물은 돌아올 때 한방울 한방울의 형태로 오지만 모여서 내가되고, 강이되고, 바다가 되며,그 과정에서 항상 아래로만 흐른다. 사람도 지위에 대한 탐착없이 오직 낮은자리를 감수하며 궂은 일을 도맡아 충실히 이행할 때 반드시 그에 수반하는 혜복이 돌아오는 법이 아닐까.
물은 서로 만나면 소리없이 합치고 모든 것을 용해하고 태워주며 흐르되 마침내 바다에 도달하면 크게 하나로 뭉쳐 그 넓이와, 깊이속에 무궁무진한 보고를 이루게 마련이다.
사람도 만나는 사람마다 사귀고 존경하며 인류전체가 한권속임을 깨달을 때 거기에는 바닷물이 시작도 끝도없이 하나로 통하둣 서로 물심양면으로 거리낌없이 통하는 복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지 않을까. 세계의 모든 사랍이 여권하나로 국경의 제한없이 어디고 넘나들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과연 어리석기만 한 일일까. 이런 생각이 든 후로부터 물은 꾸준한 나의 스승이 되어왔다. 주정일<서울대강사·아동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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