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커피가 달콤한 걸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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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일 오후 3시 폴바셋 압구정점 앞. 매장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아 줄이 현대백화점 앞 압구정대로까지 길게 늘어섰다. 흔한 게 커피전문점이고 카페인 압구정동에서 더운 날씨에 줄까지 서서 기다리는 이유가 뭘까. 30여 분을 기다린 끝에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치 로맨스 영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 조각 같은 외모에 그윽한 눈빛이 인상적인 매력적인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호주 출신 스타 바리스타인 폴 바셋(Paul Bassett·36)이었다.

그는 이날 자신의 이름을 딴 매장에서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커피를 추출해 줬다. 두 시간 동안 500명이 이렇게 폴 바셋 커피를 ‘알현’했다. 오래 기다렸다고 짜증 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모두들 “이렇게 맛있는, 게다가 그가 직접 서빙하는 커피를 맛볼 수 있다니 대단한 일 아니냐”고 했다. 커피가 뭐라고, 아니 잘생긴 바리스타 한 명이 뭐 대수라고 이런 호들갑일까. 한국에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그를 만났다.

바리스타에도 등급이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알아주는 게 WBC(World Barista Championship) 타이틀이다. 폴 바셋은 전 세계 14명뿐인 WBC 챔피언 중 한 사람이다. 2003년 미 보스턴에서 열린 WBC에서 최연소 챔피언에 오르며 호주 커피업계에서 스타로 떠올랐다.

 한국에선 바리스타라고 하면 커피머신 앞에 서서 라테 위에 우유로 하트나 나뭇잎 모양 그려 넣어주는 사람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커피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호주 등 커피 선진국에선 개념이 다르다. 바리스타는 생두를 직접 선별하는 작업부터 로스팅하고 맨 마지막에 물 온도를 제대로 맞춰 커피 잔에 담기까지 다 챙긴다. 커피 맛에 온전히 책임을 지는 셈이다. 그래서 바리스타가 추구하는 스타일에 따라 커피 맛이 확연히 다르다. 폴 바셋은 달콤한 디저트 스타일의 커피를 만들어내는 바리스타다.

 폴 바셋이 국내에 처음 매장을 낸 2009년 이후 지금까지 줄곧 가장 ‘핫’한 커피전문점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폴 바셋에 자리가 없으면 할 수 없이 근처의 다른 유명 커피전문점으로 발길을 돌릴 정도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지하 1층에 조그맣게 시작했던 매장이 지금은 19개로 늘었다. 대부분의 매장은 그의 커피를 맛보려는 사람들로 늘 바글바글하다.

 그렇다면 호주엔 얼마나 많은 매장이 있을까. 폴 바셋 원조 매장은 그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시드니에 있는 걸까. 그런데 알고 보니 정작 호주엔 그의 이름을 딴 매장이 없다. 매년 여름과 겨울로 나눠 브라질과 에티오피아의 농장에서 질 좋은 생두를 고른 후 자신만의 비율로 배합해 로스팅한 원두를 호주 현지의 커피전문점 40여 곳에 공급할 뿐이다. 국내엔 커피전문점으로 알려져 있지만 호주에선 원두 브랜드로 유명하다는 얘기다.

 사실 우리나라에 앞서 폴 바셋 이름을 걸고 커피전문점을 낸 건 일본이다. 2006년 일본의 외식 기업 와이즈 테이블이 시부야와 신주쿠에 폴 바셋 매장을 열었다. ‘에스프레소가 맛있는 곳’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매니어층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를 눈여겨본 매일유업이 와이즈 테이블을 통해 폴 바셋을 국내에 들여왔다. 사실상 원조는 일본이지만 한국에서의 인기가 훨씬 높다.

 폴 바셋 운영 업체인 매일유업 자회사 엠즈씨드의 석재원 대표는 “한국에서의 폴 바셋 인기는 기대 이상이었다”며 “프리미엄 커피를 내세운 마케팅 전략과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한 맛이 한국 사람들의 취향과 맞아 잘 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2010년 첫 방한에 이어 여섯 번째로 한국을 찾은 폴 바셋을 지난달 폴 바셋 청담점에서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이탈리아서 맛본 에스프레소에 반해 커피 입문
세계 14명 뿐인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
자기 이름 딴 매장 일본에 둘, 한국에 19곳
커피는 요리 … 생두·로스팅 등 따라 맛 달라져
에티오피아의 시다모 구지 원두 가장 좋아해

-바리스타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아버지가 셰프다. 어릴 때 아버지 레스토랑에서 다양한 요리를 맛봐서인지 자연스럽게 미각에 예민해졌다. 굳이 왜 커피냐고 묻는다면 열아홉 살 무렵 커피가 좋아졌다. 2000년 이탈리아 여행을 갔는데 그곳에서 마신 커피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 이탈리아의 낭만과 문화가 다 담겨 있었다. 이때 커피를 배우고 연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호주에 돌아온 후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는 카페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 일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2년 동안 커피숍에서 커피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배워 보니 적성에 맞던가.

 “원두 산지와 가공법, 로스팅과 추출에 이르기까지 두루 공부하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맛이 더 좋아지는지 말이다. 이렇게 연구하며 더 좋은 맛을 찾는 과정이 내 성격과 잘 맞았다. 난 커피에 대해서는 결벽증처럼 보일 만큼 완벽함을 추구한다. 커피에 관해서라면 매일 새로운 걸 탐구할 수 있다. 지루하지 않다.”

-평소 커피를 어떻게 마시나.

 “대부분 아무것도 넣지 않은 블랙으로 마신다. 이렇게 해야 커피가 지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설탕이나 우유를 넣으면 커피가 지닌 본연의 맛을 느끼기 어렵다. 잘 만든 에스프레소는 다른 커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룽고도 좋다.”

-룽고? 그게 뭔가.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주로 마시는 커피로, 보통 롱 블랙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룽고라고 한다. 아메리카노와 비슷하지만 만드는 방법과 순서가 조금 다르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샷에 뜨거운 물을 더하지만 롱 블랙은 뜨거운 물 위에 에스프레소 샷 두 잔을 더해 만든다. 아메리카노보다 양이 적고 크레마(커피 윗부분의 갈색 빛을 띠는 크림)가 남아 있어 진하고 강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커피를 맛있게 즐기는 노하우가 있나.

 “한 모금을 입안에 넣고는 단숨에 삼키지 말고 잠시 입에 물고 있어야 한다. 그 상태에서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서 목으로 천천히 넘기면 커피가 지닌 향을 느낄 수 있다.”

-바리스타로 일할 때가 아닌 다른 일상은 어떤가.

 “이탈리아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일년에 적어도 한 번은 꼭 이탈리아에 간다. 가장 좋아하는 도시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폴리지만 사실 이탈리아의 모든 게 좋다. 와인이나 음식도 정말 좋아한다. 음식 중에는 페스토를 사용한 파스타인 페스토 알라 제노베제, 와인은 디저트 와인인 시칠리아의 벤리(Ben Rye)를 제일 좋아한다. 여행말고는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한다. 일주일에 네 번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역기를 들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 겨울이면 스노보딩도 즐긴다.”

-이번이 여섯 번째 방한이다. 커피 클래스 등 행사를 할 때마다 구름 떼처럼 사람이 몰린다. 인기를 실감하나.

 “그렇다. 한국인의 특별한 사랑을 느낀다. 지난해 10월 이대점에서 매장 방문 이벤트를 했는데 매장 밖에서까지 길게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커피를 만들어주는 데 네 시간이 지나도 줄이 줄지 않았다. 대기 시간만 두 시간이었다고 했다. 나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했고 아이패드에 사인을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커피 클래스를 열 때마다 항상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처음 한국에 왔던 3년 전과 비교할 때 커피를 대하는 태도 등이 달라진 게 있나.

 “스페셜티 커피와 보통 커피, 즉 맛 없는 커피를 식별하는 능력이 높아진 거 같다. 그러나 세계적인 프랜차이즈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 같아 아쉽다.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관심은 분명 높아졌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 같다.”

-스페셜티 커피가 뭔가.

 “스페셜티 커피는 유통과정이 투명한 커피다. 과거에는 기껏해야 내가 마시는 커피의 원산지 정도만 알지 않았나. 스페셜티 커피는 원두가 생산된 국가·지역·농장·농부·품종·수확 시기·지역적 특징 등을 모두 투명하게 공개한 걸 말한다. 즉 품질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전달할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마시는 커피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커피에 관한 한 아직 덜 투명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맞다. 생두 정보가 불분명한 채로 블렌딩한 원두를 사용하고 있는 곳이 많다. 또 커피 자체의 다양한 맛보다는 시럽 등을 넣은 음료 대용의 커피가 주를 이루고 있다.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더 자리 잡았으면 한다.”

-한국의 커피 애호가에게 조언할 말이 있다면.

 “생두가 가진 다양성을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기회를 많이 가지면 좋겠다. 와인이 대중화하면서 그 맛과 향기를 즐기게 된 것처럼 말이다. 커피를 요리로 이해하면 조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각각 개성이 있는 생두라는 원료를 어떻게 요리하는지에 따라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바리스타는 요리사와 마찬가지다. 생두가 한 잔의 커피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과 요소들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최종의 맛을 이끌어 내는 작업이 바리스타의 역할이다.”

-커피 맛을 결정하는 게 생두라는 말인가.

 “그렇다. 좋은 생두를 충분히 숙련된 바리스타가 올바르게 로스팅해야 제대로 된 커피를 만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생두의 품질이다. 그래야 여러 과정을 거친 후 좋은 커피가 될 수 있다. 후배 바리스타를 교육할 때도 늘 생두가 좋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폴 바셋 매장에서 사용하는 생두를 내가 직접 고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질 좋은 생두는 섭씨 15~20도에서 보관한다. 외부의 나쁜 냄새를 흡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다음 단계인 로스팅은 원두 특성에 따라 시간을 달리 하는데 나는 평균적으로 13~15분 정도 로스팅한다. 그렇게 해야 커피의 보디감(입 안에 느껴지는 무게감 혹은 밀도)과 향이 좋다. 마지막으로 커피 추출이다. 커피 원액의 줄기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 성공 여부를 알 수 있다. 섭씨 92~92.5도에서 추출하는데 진한 갈색을 띤 커피가 천천히 떨어져야 한다.”

-선호하는 생두 산지가 있나.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시다모 구지(guji)라는 지역의 원두를 좋아한다. 처음 농장에 가서 원두를 맛 봤을 때 혀 끝에서 느껴지는 단맛에 놀랐다. 또 다양한 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마치 잘 숙성된 디저트 와인을 맛 보는 것 같았다. 사탕 정도의 단맛과 살구 같은 과일의 느낌, 풍부한 보디감까지 뛰어난 와인 같았다. 가공방식은 자연건조 방식(내추럴 프로세스)으로 가공했을 때 맛이 가장 뛰어나다.”

폴 바셋
사는 곳: 호주 시드니
1978년 호주 출생
2000년 이탈리아 여행 후 바리스타 입문
2002년 호주 바리스타 대회 7위
2003년 호주 바리스타 대회 우승
2003년 WBC 월드 바리스타챔피언 우승
2006년 일본 도쿄에 폴 바셋 커피전문점 오픈
2009년 한국 진출 

글=송정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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