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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캄보디아서 돌아온 박정환소위 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작년 구정 월남「미토」시에서 「베트콩」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한뒤 「캄보디아」에 억류끝에 송환된 박정환소위(27·용산구이태원동 군인「아파트」 1O동113호)는 지난17개월동안 겪은 고난의 나날을 수기로썼다. 박소위는 그동안의 고생때문에 온몸이 피붓병에 걸리고 시력이0.1이하로 약해지는등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 글을쓰기에 겨웠으나 자기에게 오늘이 있도록 성원해준 국민과 정부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이체험담을 쓴다고 말하고있다.<편집자주>
월남군 7사단 태권도 교관이었던 나는 주둔지인「미토」시의 남녀노소 할것 없이 특히 미군 고문단및 미해군등 거의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1968년 1윌6일 태권도 시범을 통하여 「미토」시민들과 몹시 친해졌으며 나는 월남인에게 「아우셔」(교수)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투숙호텔에 포탄두발 정글엔 예광탄줄짓고>
68년1월30일, 10일간의 휴가를얻은 나는 내가 데리고있던 김하사와 민간인 기술자들과 기술자집에서 준정「파티」를 가진후 밤9시께 그들과 헤어졌다. 사복차림인 나는 단신으로 나의 「지프」를 몰고 「미토」시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미해군들과 만나서 조금 이야기 하다보니 밤10시가 넘은것을 알았다.
나는 그제서야 나의숙소인 월남군 훈련소로 돌아가려 했으나 밤10시가 넘으면 철조망문이 닫혀지는 탓으로 나는 차를 몰고 부득이「민칸· 호텔」로 가지않을수 없었다. 그때 나는 3대의 「탱크」가「사이공」쪽으로 가는것을 보았다. 「민칸·호텔」에 기숙하고있는 민간기술자 세사람이 나와 몹시 친했던 탓으로 자주 놀러 갔었다.
13호실에 방을 정한 나는 다른「파티」에서 술이 몹시 취해온 민간 기술자 채규창씨를 복도에서 만났다.
그 이전에 단두번 만난 적이있는 채씨와 나는 단지 인사할 정도뿐이었고 채씨는 16호실에 방을 정했다고 말했다.
4층인 「호텔」에서 2층에 방을 정한 나는 12시쯤 「버스」정류장인 「호텔」앞 광장에 철모를쓴 월남군인이 그당시 처음으로 보급된 M16을들고 우왕좌왕하고 있었으며「호텔」옆강 건너 「정글」에는 예광탄의 불빛이 줄지어 군데군데 솟아오르고 있었다.
보통 1주일에2∼3회씩 「베트콩」의 포탄이 날아들므로 나로서는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다. 밤1시쯤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으나 그래도 나는 아무런관심없이 누워 잠을 잤다.
새벽3시쯤 포성은 더욱 요란하고 가끔 아비규환이 들렸을때에 방문의 「노크」소리가 들렸다.
내가 방문을 열었을때 겁에질린듯한 채씨는 내 방에 들어오면서 바깥사태가 험악함을알고 걱정했다.
나는 채씨에게 『전통있는 월남군 7사단과 미군 1개여단이 가까이 있으니 곧 조용해질 것이다』라고 위로했다.
채씨는 내방에서 나간 후에도 불안해서 재차 여러번 내방에 왔다갔다 했었다.
그때 갑자기 「호텔」이 흔들릴듯한 큰포성이 바로옆에서났다.
나는 내「지프」가 폭파되지나 않았나 하고 복도로나와서 2층 「베란다」에 갔다.
밖에는 수많은 「베트콩」들의 행렬이 있었으며 이것을 보고 놀란 우리들은 내방으로 가서 두사람은 침대밑에 숨었다.
포탄은 「호텔 을 무너뜨려 버릴듯 바로옆에 떨어졌다. 차후에안 일이지만 「호텔」에 두발의 포탄이 명중했다.
나로선 「베트콩」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으며『나의 살을 주고 상대의 뼈를 베어라』라는나의 태권도 교훈대로 아무리 많은 「베트콩」이라도 멋대로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채씨는 나의 태권도기술을 믿는 탓인지 곁을 떠나지않았다. 나는 채씨가 나와 같은기술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순간적인 생각이났다.

<"네가 「따이한」이냐" 밖엔 베트콩 신음소리>
결국 우리는 그 자세로 「호텔」주인을 앞세운 약20명의 「베트콩」에 의해서 우리의 방문이 열려지고 우리는 그들의 총부리앞에 무기력한 상태로 놓이게 되었다.
나는 사생결단을 내려했으나 같이있던 채씨때문에 어떻게 행동할수가 없었다. 그때의 나의 심정은 매우 침착했다. 만약을위해서 침대의 「매트리스」속 깊이 나의 신분증을 숨기긴했으나 그냥 따라나서기란 어쩐지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웠다.
『한바탕 치느냐? 아니면 따라가느냐?』는 갈등의순간 나는 대한민국의 젊은태권도교관으로서 어떠한 위험속에서도 능히 처치할수있다는 굳은신념속에서 욱받쳐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면서 주먹을 움켜잡고 묵묵히 따라나섰던 것이었다.
「호텔」주인은 총부리 앞에선 채씨를보고 자기의 인지손가락으로 자기목을 그어보이는 흉내를 내면서 채씨를 희롱했다.「베트콩」은 맨발이었으며 핏발이 서린 눈으로 우리를 월남군 유격대원 1명과같이 끌어냈다.
「호텔」앞 광장 한 구석에는 기관포를거치한 「베트콩」이 공중에 높이 뜬 L19를향해 쏘고 있었고, 군데군데마다 집은 화염에 싸여있었으며 많은 「베트콩」들은 부상자들과 시체를 운반하고 있었다.
「호텔」옆 빈민촌의 한집에는부상당한 많은 「베트콩」들이 피를 홀리며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었다.
「베트콩」들은 우리가 묶이기전 「호텔」4층에 있던 민간기술자로부터 빼앗아온 「카메라」와 전축과 많은 우리가요「레코드」판이든 통을 들고 서서「카메라」를 어떻게 찍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팔과 손목을 단단히 묶은후 「호텔」뒤 검은 진흙당을 건너서 200m떨어진 강기슭에 갔을때 늙은 뱃사공이 「베트콩」시체와 우리들과같이 수송한후 우리들은 많은 「베트콩」예비군이 있는 제법 큰과수원을 지나 한「베트콩」장교를 만났다.
그는 나더러 월남어를 아느냐고 물었을때 나는 조금안다고 대답했고 그는 『네가「따이한」의 박정희군대냐?』고 물었다.
그후 우리들은 수많은 「베트콩」들이 오가는 길을 따라서 동쪽으로 가서 한부락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그들의 강요에 의해서 흙탕물로 더럽혀진 바지로 눈을 가리고 평상위에 눕게됐다.
그때 많은 「베트콩」 남자와여자의 음성이 왁자지껄 들렸고 남보다 유달리 많은 내 다리에난 털을 뽑고 꼬집으며 희롱했으며 내가 치욕에 떨고있는 동안에 채씨는 나를 가끔 툭툭 찼다.

<말없이 불안에 떨기만 거의가 미장비로무장>
나는 눈을 가린 상태였으나 채씨가 불안속에 떨고있는것을 직감했으며 나는 채씨에게『이제 죽일 모양입니다. 죽기전에 개죽음을 당하지말고 놈들의 고환이라도 걷어차고 싸우다가죽읍시다』라고 말했으나 채씨는 시종 말이 없었고 나를 툭툭차기만 했다.
우리들의 눈이 풀렸을 때는이미 밤이었고 「베트콩」은 계속 우리들을 끌고갔으며 도중에 만난 조그만 부락에서 쉬었을 때는 많은 부락의 남녀노소들이 등잔을 들고 나와서 우리의 얼굴을 비추어 보기도하며 『따이한, 따이한』이라 불렀으며「미토」시 쪽으로 가고 있는 많은 「베트콩」들은 AK(자동화기)·CKC(반 자동화기)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미군장비였는데 이에대해 나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다시 끌려가기 시작했다.
포로가 되었을때부터 가장두려워했던것은 「베트콩」도「베트콩」이지만 미군비행기의 공격과 포격이었다.
깊은 밤까지 거의 뛰다시피해서 「미토」지역 「베트콩」의 총본부인듯한 절간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많은포로들이 끌려와있었으며 그중「미토」지역「베트콩」의 가장 높은듯한 장교가 나와서 두사람을 땅바닥에 묶은채로 앉힌후 최초로 신문했다.
그는 월남어를 아느냐고 물었을때 나는 조금 할수 있다고 대답한후 대화했으나 잘통하지 앉자 그는 종이쪽에다 영어로 써서 너의 신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때 나는 영어회화로 나는 한국군소위라고말했으나 그는 알아듣지 못하기에 영문으로 써서 내신분을 밝혀 주었고 채씨신분도 밝혀주었다.
나는 곧 나는 장교이고 채씨는 민간인이니 국제법에 의해 다루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너희들이 우리를 국제법에 의해 다루어 주지않기때문에 너희들을국제법에 의해다룰수없다』고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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