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100> 두 번째 서울시장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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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3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고건 전 총리 이임식. 고 전 총리가 간부들의 송별에 답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7년 12월 22일 12명으로 구성된 비상경제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정부 측 대표는 임창렬 경제부총리가, 당 측 대표는 김용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부총재가 맡았다. 위원회는 외환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사실상의 비상내각 역할을 했다.

 나는 물러나는 총리로서 마지막 업무를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국회 임명 동의를 아직 받지 못한 김종필 총리 후보를 대신해 98년 3월 3일 새 장관들을 임명 제청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비상시국이었다. 새 내각이 시작부터 혼란에 빠져선 안 된다는 생각에 어렵사리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이날 김대중(DJ) 정부 ‘일일 총리’ 역할을 끝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꼭 1년 전인 97년 3월 3일 총리로 내정됐을 때 “이번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마지막 봉사 기회라는 각오로 온몸을 던져 일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총리에서 물러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98년 3월 중순 박정수 외교통상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주미대사를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DJ 뜻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바로 대답을 했다.

 “아, 그건 아닌 듯합니다. 주미대사는 미국 유학파가 맡아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전 미국에서 1년 반 정도 있었고 짧게 유람한 정도에 그칩니다. 제대로 미국에서 유학한 사람을 뽑아야 학맥도 인맥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절했다. 얼마 후 이종찬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같은 내용이었다. 내 대답도 변함없었다. “내가 국가의 일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때만 공직을 맡았습니다. 주미대사직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 진퇴의 원칙에 반합니다. 미국 유학파를 기용하십시오.”

 거듭 거절했다.

1998년 4월 여당인 국민회의의 서울시장 후보 출마 제의를 받아들인 고건 전 총리가 수첩에 쓴 내용. 주택·수도·교통·쓰레기 등 서울시 정책에 대한 구상이 적혀 있다. [고건 전 총리 제공]

 다음 달인 4월 새정치국민회의 조세형 총재 권한대행이 종로구 연지동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두 달 뒤 있을 민선 2기 서울시장 선거에 국민회의 후보로 나가 줬으면 한다”는 말을 했다. 94년 DJ가 권노갑 전 의원을 통해 민선 1기 서울시장 출마를 권유했던 기억이 났다.

 4년 전과는 이제 상황이 달랐다. 난 자유로운 몸이었다. ‘서울시장이라면 한 번 해 본 경험이 있다. 관선 서울시장 때 시작했던 일을 마무리하는 것도 보람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쉽게 결정 내릴 일이 아니었다. 조 대행에게 말했다.

 “전 돈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거비용을 댈 능력이 없습니다.”

 그의 답은 명쾌했다. 바뀐 선거법을 설명해 줬다. “일정 득표율 이상을 얻으면 국고에서 선거비용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정치자금법에 의거해 후보도 후원금을 받을 수 있고, 그 돈을 개인 활동비로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에서도 선거자금을 지원할 겁니다.”

 “그럼, 수락하겠습니다.”

 조 대행이 사무실을 떠났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임명직 서울시장으로 일하며 야심 차게 시작했던 5~8호선 2기 지하철과 내·외곽 순환도로 공사를 다시 내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수서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서울시장직에서 경질되면서 미처 하지 못한 일이 많았다. 많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검은색 표지의 작은 빈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 서울시정 핵심 과제를 적어 내려갔다. 불과 사나흘 만에 수첩 안은 빼곡한 글씨로 다 찼다. 그때 만든 수첩은 이후 서울시장에 당선되고 4년 내내 들여다보며 시정 방향을 점검하는 나만의 ‘체크리스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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