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시 때문에 택한 녹색 코트 … 정현, 윔블던을 흔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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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이 7일(한국시간) 영국 윔블던 올잉글랜드 클럽에서 열린 주니어 남자단식 결승에서 이탈리아의 잔루이지 퀸지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다. [런던 AP=뉴시스]

안경을 써도 눈이 침침했던 아이가 한국 테니스에 희망의 불꽃을 밝혔다.

 남자 테니스 주니어 세계랭킹 41위인 정현(17·삼일공고)은 7일(한국시간) 영국 윔블던에서 열린 윔블던 테니스대회 주니어 남자 단식 결승에서 주니어 7위 잔루이지 퀸치(17·이탈리아)에게 0-2(5-7, 6-7)로 아쉽게 져 준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정현은 윔블던에서 1994년 전미라(35)의 주니어 여자 단식 준우승 이후 19년 만에 남자 단식에서도 준우승을 일궈내며 세계에 한국 테니스의 저력을 알렸다. 한국 테니스는 2009년 이형택(37) 은퇴 후 침체기였다. 남자프로테니스(ATP) 세계 랭킹 100위권이 전무하면서 관심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 17세인 정현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됐다.

 정현은 이번 대회 파란의 주인공이었다. 주니어 랭킹 1위 닉 키르기오스(18·호주), 6위 보르나 코리치(17·크로아티아), 30위 막시밀리안 마르테레르(18·독일)를 차례로 제압했다. 그러나 퀸치는 넘지 못했다.

 정현은 지난해 퀸치와 클레이코트에서 한 차례 맞붙어 졌다. 그래도 정현은 이날 강서브를 내세운 퀸치에게 밀리지 않았다. 정현은 매끄러운 스트로크를 코트 구석구석으로 찔러넣으며 퀸치를 압박했다. 하지만 정현의 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정현은 오른쪽 발이 불편한 듯 절뚝거리더니 2세트 2-1로 앞선 상황에서 메디컬 체크를 가졌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정현은 붕대를 감고 뛰었지만 2세트 6-6에서 타이 브레이크 고비를 넘지 못했다.

 정현은 아버지로부터 테니스 DNA를 물려받았다. 아버지 정석진(47)씨는 실업 선수로 뛰었고, 현재는 삼일공고에서 테니스를 가르치고 있다. 형 정홍(20)은 건국대 테니스 선수다. 하지만 정현은 7세까지 테니스를 쳐본 적이 없다. 어머니 정현모(44)씨는 “큰애가 테니스를 하기 때문에 현이는 공부를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현이가 유치원 때 계속 눈을 찡그려 안과에 갔더니 심각한 약시라고 했다. 안경을 써도 교정시력이 썩 좋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책 대신 눈이 편안해지는 초록색을 많이 봐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정씨는 바로 테니스를 떠올렸다. 그는 “테니스 공도 코트도 녹색이잖아요. 현이에게 테니스는 운명이었죠”라며 웃었다.

 정현은 테니스 라켓을 쥐자마자 일취월장했다. 실력이 앞서 있는 형과 훈련을 하다 보니 또래보다 더 빠르게 기본기를 익혔다. 약시도 극복했다. 움직이는 공에 반응하다 보니 동체시력(움직이는 물체를 보는 시력)이 좋아진 것이다. 정현은 12세에 권위 있는 국제 주니어 대회인 오렌지볼에서 우승, 12세 이하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2011년 오렌지볼 16세부도 제패했다. 올해 성인 투어를 뛰기 시작한 정현은 6월 김천국제퓨처스 대회에서 한국 선수 중 최연소(17세1개월)로 단식에서 우승했다. 정현의 강점은 17세답지 않은 노련함이다. 유진선 SBS ESPN 해설위원은 “정현은 두뇌회전이 빠르다”며 “아버지를 따라 고교대회를 다니면서 수백 경기를 보고, 자기만의 경기 운영 시뮬레이션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약점도 있다. 서브 완성도가 떨어진다. 이형택은 “어깨와 허리를 다 이용해 몸을 회전시켜 서브를 넣어야 하는데 아직 부족하다”며 “서브를 보완하면 나를 넘어 세계랭킹 10위 안에 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정현은 현재 ATP 세계 랭킹 514위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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