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3천년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킨 "통곡의 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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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통곡의벽」이라 불러왔다. 3간년의 수난을 겪는동안 이성지를 찾아오는 유태인이면 먼저 민족의비운을 통곡해야했다고해서 그렇게 불리게 됐다는 얘기다. 길이 한 2백장에 높이가 약20장, 사람 한길만큼씩한 바윗덩이들로 쌓인 벽은 그대로가「이스라엘」민족의 역사라고해도 괜찮을는지 모는다.

<폐허위에 성전재건>
이곳 「예루살렘」 「올리브」동산 계곡에 유대인들의 성전이 세워지기는 서기원년을 앞서 9백6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천년전 「솔로몬」왕때 일이었단다. 「메시아」의 회귀를 맞기위해 지어졌다는 그 성전도 그후 2백년이 채 못돼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허물어지고 그후 다시2백년 걸려 「바빌로니아」에 끌려 갔다 온 유대인들이 폐허의 돌을 모아다시 두번째이자 마지막의 성전을 지어놓았었다.

<외세에 견딘 서쪽벽>
그것도 「그리스」의 「알렉산더」대왕을 비롯한 외세들의 거듭된 침공아래 무너져 단하나 서쪽벽만이 남아 그것이 통곡에 젖을 유대인의 성지가 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지금도 지각 난 유대인이면 그들의 수난사를 거의 연대와 날짜까지를 외며 얘기해준다.
「알렉산더」전에도 「로마」「페르샤」「오토만」제국들은 「예루살렘」을 자기집 문턱 드나들듯 했었다.
그리고 9백년전 십자군에 의한 유대인들의 대학살, 가까이는 한 세대전 한꺼번에 6백만명이도살된 「나찌」수용소의 참극들.
이러는 동안 민족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서로 떨어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허물어져 남은 벽하나를 언젠가는 있을 복지에서의 해후를 약속하는 공통의 상징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렀다는게 그들의 눈물어린 역사의 줄거리다.

<「20년 노역」 전설도>
오랜 성상과 파란속에서도 하필 이 벽만이 그대로 온전히 오늘에 까지 이를수 있었느냐는데는 「이스라엘」사람이면 각별한 뜻을 찾을 전설들이 전해내려오고있다.
그 하나-.
이 서쪽벽의 건설을맡은 빈한한 세궁민들은 돈으로 노역을 대항시킬수도 없어 손수 20년동안이나 눈물과 피땀을 흘려 이벽을 쌓아올려갔다.
그벽 마지막 돌이 올려지는 날 비둘기 한마리가 벽위에 날아앉아 하늘을 우러러 『신이여! 이들의 피와 땀을 길이 잊지마옵소서!』하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는것이다.
그후 3천년이 지난 오늘 지금도 벽앞엔 유대인 순례자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는다.

<달라진 눈물의의미>
벽을 그저 어루만지며 멍하니 서있는 사람, 벽에 머리를 기대고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정말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모습도 볼수있었다.
그러나 같은 울음이면서도 이젠 그들의「눈물의 의미」는 많이 달라졌다.
3천년만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란 자기들의 나라를 갖게됐다.
그리고 독립후 20년동안 「아랍」제국들과 전쟁(1967년6월)까지를 치르며 이를 보위해왔고 이통에 그동안 「요르단」치하에있던 「예루살렘」성지까지도 자기들의 점령하에 들어왔다.
세계1백여나라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도 다시 몰려들어 1948년 65만정도였던 인구도 그동안 4배로 늘어났다.
소련에서도 오고 미국에서도왔다. 그리고 「가브츠」「모샤브」등 집단농장에서 흘린 주먹만한땀방울들이 모래를 적셔 사막은 녹지가되고 생활수준도 서구만큼이나 높아졌다.

<풍운속에 감춘정열>
『사람은 통곡이끝나면 대개 두가지상태로 돌아간다』고 한 유대인 노현이 벽구경을 하던 기자게 얘기해준다.
하나는 절망과 체념, 또하나는 이를 깨무는 결의와 정열이라고.
오늘의 유대인이 이들중 어느상태일거냐는 설명을하면 사족이라는 듯 그저 거기서 말을 멈춘다.
중동의 풍운은 아직도 거칠다.
젊은 처녀들까지도 총대를 들고 선 「이스라엘」사람들의 결의는 노현말마따나 이를 깨물어 으스러질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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