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고 냉정 … 조직과 바둑은 닮은꼴이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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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연재만화를 문화계 메인 장르의 하나로 끌어올린 ‘미생’의 윤태호 작가. [김경빈 기자]

웹툰 ‘미생’은 이제 우리 사회의 한 현상이다. 프로 바둑기사 입단에 실패한 주인공 장그래가 대기업 계약직 인턴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하며 겪는 이야기다. 지난해 1월 인터넷 포털 다음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누적 조회 수가 4억 건에 달했다.

인터넷·단행본·영화 동시에 인기

 단행본도 22만 부 넘게 팔렸다. 모바일 영화도 만들어졌다. 원작에 나오지 않는, 등장인물의 예전 얘기를 담은 단편을 총 6편 선보였다. 5월 말 공개 이래 누적 관객수가 300만 명에 이른다. 최근 직장생활의 교본이라는 뜻에서 ‘미생학’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을 정도다. 이달 말 막을 내리는 ‘미생’의 작가 윤태호(44)를 만났다.

 -회사생활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다.

 “처음 기획을 시작한 게 3년 전이다. 프레젠테이션 전문가, 홍보 전문가, 종합상사 직원, 방송국 프로듀서 등을 만났다. 회사생활을 해본 적이 없으니 무식한 질문까지 했다. 아침에 회사 나가면 뭘 하나, 첫 출근하면 문은 누가 열어주나, 노트북은 개인 것인가 회사 것인가, 딱풀이나 포스트잇처럼 비품을 쓰다 잃어버리면 어디서 갖다 쓰나, 등등 소소한 부분까지 모든 걸 물어봤다.”

 -만화가로 평생을 살아왔다. 회사라는 공간이 새로웠겠다.

 “정말 신기했다. 선배가 근무하는 대기업의 한 사무실에 가 본적이 있는데, 그 모습에 압도됐다. 어마어마하게 큰 공간이 기둥 하나 없이 펼쳐져 있는데, 놀랍고도 솔직히 무서웠다. 앉은 눈높이에 맞게 파티션이 설치된 책상들이 수백 개 있지만, 누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보니 삭막하고 냉정한 기운이 전해지더라.”

조직에 짓눌린 개개인에 희망 주고싶어

웹툰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 우리시대 비정규직의 일상을 보여준다. [중앙포토]

 -직장 내 암투도 생생하게 그렸다.

 “바둑과 회사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겉에서 보면 고요한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굉장히 치열하다는 점에서. 또 회사는 개인 대 상사, 개인 대 팀, 개인 대 회사 등 지속적으로 관계가 맺어지는데, 그 과정이 바둑과 같다. 회사생활이 한 수 한 수 바둑을 두는 것과 비슷하다.”

 -열광적 반응을 얻은 이유라면.

 “회사원들을 만나보니 ‘내가 지금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못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회의감에 빠지고, 자괴감에 눌린다. 사람은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을 했을 때 충족감을 느낀다고들 하잖나. ‘미생’은 눈에 띄지 않은 작은 일이라도 개개인의 역할을 기반으로 회사가 굴러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회사원이라면 적어도 업무를 보는 순간에는 어느 누구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소박한 접근이 공감대를 형성한 것 같다.”

 -‘승부를 결정지을 때는 재가 되듯 타올라야 한다’ 같은 훌륭한 대사도 많다.

 “단행본에 기보 해설을 해준 박치문 선생(중앙일보 바둑전문기자)이 해준 말이다. 프로기사는 기본적으로 승부사다. 싸움꾼이기에 불 같은 속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대국에서 자기를 완전히 태울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입단에 성공한다는 얘기였다.”

주인공 장그래, 정규직 될 수 없을 것

 -주인공 장그래가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없다. ‘미생’은 현실적인 설정을 바탕에 깔고 있다. 만화에서 장그래가 정규직이 된다고 이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를 무리하게 전개하고 싶지 않다.”

 -연재를 마친 뒤의 계획은.

 “에필로그 성격의 후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제작후기와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의 활약을 담은 ‘요르단 에피소드’를 소개하려 한다. 지난 5월 요르단 대사관의 초청으로 암만을 다녀왔다. 그곳 풍경을 더 사실적으로 그릴 계획이다.”

-총 6편으로 만들어진 모바일 단편영화 ‘미생’은 어떻게 봤나.

 “‘장그래 편’(손태겸 감독)은 굉장히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였다. ‘안영이 편’(김태희 감독)은 여백이 많아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사실 내가 만든 캐릭터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 지 만화에 설정을 안 해놓아서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질까 기대됐다. 젊은 감독들이 원작을 대범하게 재해석했다. 신선하게 잘 표현해줘 고맙다.

글=지용진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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