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식없는 작품」쓰고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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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계문화의 움직임을 소개하는 이란은 전세계에 있는 본사취재망과 본사가 입수하는 1백여종의 외국신문·잡지를 참고로 마련, 매주1회 게재한다.
지난해 6월「프랑스」를 여행하던 한 저명한 소련시인작가가「프랑스」정부애 망명처를 요구했다. 『일 모를 모르는 태양아래서』『동녁을 향해』『유목민』등 시집을 내어 소련대중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미하일·디요민」(본명「게오르기·트리포느프」)이 그곳에서 부여한 모든 특권을 박차고 망명한데 대해 주위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망명은 60년대에 들어와 계속되어온 소련특권층의 끊임없는 망명객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소련사회의 밑바닥에 깔린 불안과 좌절감을 나타내고 있다.
「디요민」은 1천5백만에 달하는 소련 전문직업인에 비해서도 훨씬 높은 수준의 생활을 했으며 당에서도 그의 작품활동을 칭찬했다. 그의 소설은 북극에 가까운 지방에 사는 사냥꾼과 금광업자들을 즐겨 그리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이 지역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려는 정책을 세워두고 있기 때문에 이민유치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망명후「디요민」은 그의 외면적 성공이 크면 클수록 자기의 작가생활에 대해서는 더욱더 실실망 느끼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말한다. 『나이가 들면 들수륵 나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는 소재를 명백하게 아무런 장식도 붙이지 않고 써야겠다는 의지가 나를 괴롭혔다. 나는「스탈린」치하에서 맛본 가정의 파괴와 집단수용소에서의 쓰라린 경험, 본의 아니게 절도단의 일원이 되어 방황하던일 등을 그대로 묘사하고 싶다. 하지만 소련내에서 이런 이야기가 검열을 통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냐프스키=다니엘」의 유명한 재판이 있은데 뒤이어 소집된 67년5월의 소련작가대회는 눈꼽만큼 남아있던 작가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말살해 버렸다.
그 이후 자유로운 의사표시나 문학적가치를 위주로한 작품은 하나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 대회는 당에의 충성심을 과시하는데서 그쳤다. 곧 이어「솔제니즈인」의 작품이 판매금지 되었다. 이로써 문인에 대한 관료화는 절정에 달했다.
소련작가가 거쳐야 하는 검열은 세단계가 있다. 첫째 출판사이고 둘째 정부검열관이며 세째가 출판사에서 출간하기로 이미 결정한 작품속에서 부분을 마음대로 고쳐쓰는 편집자의 곡필이다. 예를들어 출판사가 받아들인 작품속에서 등장인물이 종교적 토론을 하는 장면이나 전략적 지명이 들어있는 경우 이는 무자비하게 깎여버린다.
그렇지 않고는 검열관의 도장을 받을 수가 없으며 검열관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글을 한줄만 인쇄해도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디요민」이 도망쳐온 소련의 문학풍토는 이런 것이었다.
「파리」의 친척집에서 계속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자유와 사랑과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애에서 가장 숭고한 것이라고 말하고있다. 『이제 자유와 사랑을 얻었고 조금만 행운을 얻으면 세계를 볼 기회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흐뭇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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