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자하리아스를 넘어 … 박인비, 새 전설이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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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25·KB금융그룹)와 비교할 수 있는 현역 골퍼는 없다. 그는 잠들어 있는 전설, 베이브 자하리아스(1914~1956·미국)를 깨웠다. 박인비가 1일(한국시간) 미국 뉴욕주 사우샘프턴의 세보낵 골프장에서 끝난 68회 US여자오픈에서 합계 8언더파로 우승했다. 4월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6월 웨그먼스 챔피언십에 이어 3개 메이저 대회를 연속 석권했다. 미국의 골프 칼럼니스트 존 스트레지는 ‘오늘 경기를 자하리아스가 봤다면 박인비의 명연주에 찬사를 보냈을 것”이라고 썼다.

 메이저 3개 대회 연속 우승은 1950년 자하리아스에 이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64년 역사상 두 번째 기록이다. 선수들의 기량이 발전하고, 경쟁이 훨씬 치열해진 현대 골프에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스트레지는 “클럽은 지휘봉이 아니고 골프는 교향악도 아니다. 하지만 퍼터를 든 박인비는 명작을 만들어내는 교향악단의 명지휘자였다”고 찬양했다.

 자하리아스는 근대 스포츠의 혁명가였다. 분야와 종목, 심지어 성별을 넘나드는 천재였다. 그는 1932년 LA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80m 허들·창던지기), 은메달 1개(높이뛰기)를 따냈다. 이뿐만 아니라 야구·농구·테니스·복싱·펜싱·사격 등에서 국가대표급 실력을 자랑했다. 1999년 AP통신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수 100명’을 꼽았고, 자하리아스를 여자 선수로는 가장 높은 9위에 올렸다. 그가 드라이버를 잡으면 평균 250야드의 샷을 날렸다. 그는 1945년에는 세 차례 미국프로골프(PGA) 대회에서 컷을 통과, 남자들과 경쟁한 유일한 여자 선수였다. 대장암 수술을 받고도 우승 행진(통산 41승)을 이어갔다.

 박인비의 기록은 전설을 다시 일으켜 세울 만큼 놀랍다. 1950년 US여자오픈 참가 선수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공식 기록이 시작된 1953년 참가자는 37명이었다. 이번 대회엔 투어 멤버 92명에 미국 지역예선(1420명 출전)을 통과한 64명을 합쳐 156명이 겨뤘다.

 열 살 때 클럽을 쥔 박인비는 골프가 취미이자 일이고, 첫사랑이다. 어린 시절 배운 피아노조차 섬세한 퍼팅으로 연결한 골프 스페셜리스트다. 미국 NBC 방송의 골프해설가 로저 몰비는 “박인비가 세계 골프팬들의 관심을 LPGA 투어로 집중시켰다. 그 원동력은 초자연적 수준의 퍼팅이다”라고 평가했다. LPGA 정상급 선수인 폴라 크리머(27·미국)는 “박인비가 전체 선수들의 실력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LPGA는 그동안 한국 낭자군단과 청야니(24·대만) 등 아시아 선수들의 독무대였다. 이 때문에 PGA에 비해 골프팬과 언론의 주목도가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박인비가 자하리아스의 63년 전 기록을 재현함으로써 LPGA는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8월 1일 영국에서 열리는 네 번째 메이저 대회인 브리티시 여자오픈까지 우승한다면 박인비는 자하리아스를 넘어 새로운 LPGA의 전설이 될 것이다.

최창호·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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