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장신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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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칼은 부러졌다. 그러나 나는 부러진 칼끝을 잡고 끝까지 싸우겠다.』
「벨던」의 영웅 「페탕」이 이끈「프랑스」가 독일에 굴복한 1940년6월, 영국에 건너 간「드골」은 이렇게 「프랑스」국민에게 저항을 호소하였다.
그후 「드골」은 「샤를」 장신왕이란 별명을 갖게 될 정도의 권위와 권력을 지니게끔 되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위대성에는 신비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너무 알게 되면 존경하지 않게된다』 고 언젠가 「드골」자신이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그가「프랑스」의 우상으로 그처럼 오랫동안 군림할 수 있었던 까닭과도 관계가 있다.
또하나의 까닭은 국민투표에 있었다. 그가 58년에 정계에 「컴백」했을 때에도, 그리고 62년에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위한 개헌을 할때에도 국민투표에 의해서였다. 그런 그의 신비성도 이제 집권 11년만에 그 「베일」이 벗겨진 모양이다. 그리고 또 그를 권력의 좌에 앉혔던 국민투표가 이번에는 그를 하야케 만들었다.
국민투표라는 직접 민주제의 한 방식은 흔히 왕정의 복고나 폐지, 개헌, 또는 영토의 변경등의 경우에 이루어진다. 특히 서구에서는 1830년의 「파리」 혁명 이후 유행되었다. 그 가장 유명한 예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위해서 실시했던 국민투표다.
그러나 고대 희랍시대를 제쳐 놓는다면 근대사에 있어서 국민투표때 집권자측이 패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집권자측에 승리의 자신이 있을 때에만 의회를 제쳐놓고 직접 국민의 시임을 묻는 것이라고 볼수도 있다.
오직 하나의 예외는 2차대전 직후인 46년에 「프랑스」 제4공화국의 신 헌법안이 국민투표때 부결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5개월 후에는 다시 가결되었던 것이다. 이번 국민투표때에도 「드골」에게 꼭 승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오한 그가 마땅한 하야의 계기를찾기위해서가 아니었는가 하는 느낌조차 있다.
그것은 스무자도 안되는 짤막한 그의 사임성명문에서도 짐작이 간다. 역시 「샤를」 장신왕다운 일이었다고 할까. 『「프랑스」의 우익은 국가를 배반하였고, 좌익은 국민을 배반하였다.』이것도 「드골」의 말이지만 문제는 이말이 앞으로의 「프랑스」에도 들어맞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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