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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빠지자 동남아 손님 밀물 … '관광 물주' 바뀐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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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달 19일 도쿄의 번화가 신주쿠(新宿)의 가부키초(歌舞伎町) 거리, 중고 명품 할인점 ‘긴조(銀<8535>)-신주쿠 2호점’의 점장 야구치 가쓰야(矢口勝也)가 외쳤다. “올 거라고 했잖아요. 이제부터 잔뜩 몰려옵니다.” 그의 공언대로 오후 5시가 가까워 오자 버스들이 몰려들었다. 버스마다 동남아 관광객들이 꽉꽉 차 있다. 첫 버스는 인도네시아, 두 번째는 태국인을 태웠다. 낮 동안 한가하던 ‘긴조’ 매장도 분주해졌다. 명품 가방을 살피던 30대 태국 여성 관광객은 능숙한 한국말로 “한류가 좋아 한국어를 배웠는데, 엔화가 싸지면서 일본에 자주 쇼핑을 온다”고 인사했다.

지난달 19일 도쿄 신주쿠를 찾은 인도네시아 관광객들(왼쪽 사진).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태국인이 큰손 … 씀씀이 한국인의 2배

 ‘긴조’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샤브샤브 요리 전문점 ‘모모 파라다이스’도 마찬가지. 저녁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인 오후 5시부터 인도네시아와 태국 손님 40여 명이 밀려들었다. 세키가와 겐지 지배인이 보여준 예약표에는 만찬을 예약한 동남아 단체 관광객만 10팀이 넘었다. 태국이 가장 많고, 인도네시아·싱가포르·필리핀 순이었다.

 “스시와 만화 때문에 일본에 관심이 많다”(23세 인도네시아 대학생), “ 일본에 오자마자 디즈니랜드와 디즈니 시를 다녀왔는데 정말 좋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도시다.”(40대 인도네시아 남성), “태국에서 인기있는 이세이미야케 백을 사러 왔다”(20대 태국 여대생들) 등 일본을 찾은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동남아 관광객들의 폭발 현상은 도쿄나 신주쿠만의 풍경이 아니다. 북쪽 홋카이도(北海道)에서부터 명소인 후지산, 도쿄 주변의 가마쿠라(鎌倉)와 요코하마 등 유명 관광지마다 동남아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동남아 주요 6개국에서 올 1~5월 일본을 찾은 이들은 지난해에 비해 35%나 늘었다.

 성장세가 가장 가파른 건 태국이다. 일본 방문 태국인 수는 올 들어 5월까지만 18만1300명이다. 5월만 따지면 지난해 5월보다 70%가 많다. 태국 관광객의 증가는 한때 ‘큰손’으로 통했던 중국 관광객의 퇴조 때문에 더 눈에 띈다. 일본을 찾는 중국인은 지난해 10월부터 8개월째 전년도 같은 달 대비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다. 올 1~5월엔 지난해보다 30%나 빠졌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으로 험악해진 양국의 외교 갈등이 직격탄이 됐다. 이 때문에 “중국인이 비운 자리를 태국인이 채운다”는 게 일본 관광업계의 올해 최대 화두다.

 동남아 관광객들은 왜 늘어날까. 일본 최대 여행사인 JTB 홍보실의 미쓰하시 아키코(三ツ橋明子) 매니저는 “최근 가파른 경제성장으로 동남아 국가들 내부에 중산층이 많이 늘어났다”며 “이들의 해외 여행 욕구가 커진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했다.

 엔저 영향도 무시 못한다. 일본이나 유럽 명품 브랜드를 싸게 구입하는 쇼핑족이 불어났다. 실제로 일본의 대형 백화점인 다카시마야(高島屋)가 올해 국가별 외국인 고객 수를 집계했더니 태국이 중국에 이어 2위였다.

비자 면제, 전용 여행코스 만들기 분주

다카시마야 관계자는 “태국인들은 구입 단가가 크다”고 말했다. 태국 왕비가 애용한다는 이세이미야케의 가방은 한 번에 3~4개씩 사 가 백화점마다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영어·한국어·중국어 일색이던 도쿄 시내의 ‘면세점’ 간판엔 어느새 태국어가 더 좋은 자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관광청에 따르면 태국 등 동남아 관광객 한 사람이 일본 국내에서 소비하는 돈은 13만 엔(약 150만원) 전후로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 1인당 평균 6만5000엔(약 75만원)의 두 배다.

 일본 정부는 아베노믹스 성장 전략의 한 축으로 관광 진흥을 내걸고 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2012년 1조860억 엔(약 12조5000억원)이던 관광객들의 일본 내 소비액을 2030년엔 4조7000억 엔(약 54조원)으로 늘리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실현되려면 동남아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최근 정부 내 ‘관광입국추진각료회의’에서 결정된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비자 완화 조치는 이례적으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직접 발표했다. 태국과 말레이시아에는 비자 면제, 필리핀과 베트남엔 복수 비자 발급 개시, 인도네시아엔 체재 기간 연장 조치가 취해졌다. 하지만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비자 완화나 문화 홍보 등에 있어 라이벌인 한국에 뒤지고 있다”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진단했다. 일본 정부나 언론은 반드시 넘어야 할 대상으로 한국을 지목하고 있다.

한류 이기려 ‘쿨 재팬’ 일류 띄우기

 동남아 주요 6개국의 경우 지난해 일본 입국자 총수는 77만5000여 명으로 한국 입국자(130만6000여 명)에 크게 못 미친다. 이를 올해 100만 명, 2016년 200만 명으로 늘린다는 게 일본의 목표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비자 이외의 또 다른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의 장기체류 비자를 본떠 자산이나 연 수입이 일정액을 넘는 동남아시아인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수년간 일본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또 항공기 일등석을 타는 부유층을 위해 입국 절차가 간편한 특별 레인을 입국장에 만드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쿨 재팬’이란 이름으로 애니메이션과 드라마·J팝 등의 대중문화를 동남아에 전파하는 데도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한류에 대항하는 문화 콘텐트를 앞세워 관광 흡인력을 키우겠다는 의도다.

 여행사들도 ‘동남아 올인’ 태세다. JTB는 2015년까지 3년간 210억 엔(약 2400억원)을 투입해 현재 570개인 해외 제휴 여행사를 2000개로 늘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 절반인 1000개 이상을 동남아 회사로 꾸릴 계획이다. 또 현재는 동남아 관광객을 위한 일본 내 여행 코스가 2~3개에 불과하지만 이를 연내에 50개로 늘리기로 했다. 기존 영어·한국어·중국어만 서비스됐던 해외 인터넷 예약 사이트에 태국어 서비스도 곧 시작한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돼지고기 뺀 라면, 기도실 제공 … 이슬람 문화 배려하는 관광업계

동남아 관광객을 잡기 위한 일본 관광업계 비장의 카드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배려’다. 이슬람교도가 많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가 목표다. 전국 각지의 유명 라면이 집결한 요코하마의 라면 박물관은 상대적으로 발걸음이 뜸한 동남아 이슬람 관광객을 겨냥해 7월부터는 돼지고기와 알코올 성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라면을 내놓는다. 홋카이도 루스츠(留壽都)의 리조트는 이슬람교도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일컫는 할랄 메뉴를 구비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의 기도를 위한 각종 편의도 제공한다. 회의실을 기도실로 제공하고, 이슬람 신자들이 메카의 방향을 체크할 수 있도록 나침반도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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