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빼앗긴 정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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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폐회식날 일방「팀」에 수여되는 박정희장군배는 그날 따라 유난히 크고 빛나게 보였다. 5년간 간직할때는 미처 몰랐다. 우승배의 5색광채를 바라보던 눈앞이 갑작스레 흐려졌다.
여자선수이기 때문에 눈물이 쏟아진것은 아니다. 승부의 세계가 그처럼 가혹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만도 아니다.
매일같이 성원을 보내던「팬」들의 성의에 찬얼굴이 떠오르고, 멀리 미국에 있는 신자언니, 그리고 명자·추자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모두가 한국농구의 우승을 그토록 갈망해 왔기에 등뒤로 쏟아지는 시선들이 꾸짖는 것만같았다.
선수생활 10년-. 그래도 숨가쁜 경기가 끝난 후에는 보람이 있었다. 때로는 승리의 쾌감을, 때론 우승의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더우기「팬」들의 갈채와 함께 한「포인트」한「포인트」씩 쌓아 이룩한「아시아」정상이고 보면 그 소중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은 것이다.
이렇듯 소중하기만한 한국농구가 동남아여자농구대회를 계기로 일본과 자리를 바꾸자 눈앞은 캄캄하고, 가슴이 매어지는 것만 같았다.
우선「팬」들을 대할 낯이 없어졌다. 우리농구가「아시아」의 최강이 되기까지 그처럼 갈채와 후원을 아낌없이 보내온「팬」들이기에 오히려 두려움마저 앞선다. 여자농구는 이미 우리들 선수의 농구도, 농구인의 농구도 아닌「팬」들의 농구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한국농구를 이룩해놓은 언니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도 걱정스럽다. 그동안 우리는 언니들의 화려한 손길이 빛나는 「코트」속에서 그저 안일하게 살아왔을 뿐이다. 안일속에서는 정신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고, 기술 역시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승패의 주사위는 대회전부터 던져진 것이 아닌지 모른다. 이제「아시아」여자농구의 만도 는 달라졌고 우리는 허탈속에 빠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루 빨리 재기하는데 있다. 그칠줄 모르는 투지와 온갖 정열을 다하여 잃어버린「아시아」의 정상을 되찾고 세계정상에도 도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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