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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슈트는 몸 치수 재기 전 고객의 마음부터 재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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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1. `고급 맞춤 슈트 서비스`인 MTM 전용 공간. 서울 삼성동 현대백화점에 새단장한 에르메네질도 제냐 매장이다.

‘메이드투메저(made to measure)’는 우리말로 ‘맞춤’이란 뜻이다. 의류에선 ‘레디투웨어(ready to wear)’, 즉 기성복과 구별하기 위해 많이 쓴다. 메이드투메저, 줄여서 MTM으로 일컫는 이 용어는 어느샌가 ‘최고급 맞춤 양복’의 다른 말처럼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MTM을 전문으로 하는 브랜드가 점차 느는 추세다.

이탈리아 브랜드 ‘에르메네질도 제냐(이하 제냐)’에서 MTM 전문가로 일하는 미켈레 델비스코(48)는 “제냐는 35년 전 기업화한 브랜드 중에선 최초로 MTM 서비스를 시작했다”며 “한국 등 세계 각국의 안목 있는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높아지고 있어 MTM 서비스를 강화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최근 서울 삼성동 현대백화점 코엑스점의 제냐 매장은 MTM 서비스 공간을 확충해 새 단장을 마쳤다. 델비스코의 안내를 따라 ‘최고급 맞춤 양복’ MTM 서비스의 세계를 살펴봤다.

고객과 대화하며 최적의 스타일 찾아

2. MTM 전문가 미켈레 델비스코가 고객과 상담하며 사이즈를 재고 있다.

MTM 서비스의 시작은 환영 음료다. 소위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도 단골 고객에게 이따금씩 하는 접대 방식이다. 제냐의 MTM 슈트는 최저 400여만원에서 많게는 4000만원이 훌쩍 넘는 돈을 지불해야 하는 고급 제품. 음료 정도 서비스는 당연해 보였지만 델비스코의 말에 따르면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아야 진짜 MTM 제품이 된다. 그래서 고객이 최대한 편안하게 느끼는 상태에서 상담을 시작해야 고객이 원하는 걸 제대로 반영한 MTM 슈트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MTM 고객을 상대해 온 그는 “100명의 고객이라면 100명 모두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기본적인 질문에도 대답하길 꺼리는 고객, 자신이 원하는 옷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 고객, 적극적으로 요구 사항을 나서서 얘기하는 고객 등 다양하다”고 했다. 매장의 기본 질문은 이랬다. 직업이 무엇인지, 그래서 주로 어떤 환경에서 MTM 맞춤 양복을 입는지, 원래 갖고 있는 양복은 어떤 재질·색상·모양인지 등이다. 물론 기존 단골 고객이라면 이런 정보를 매장에서 모두 파악하고 있고, 응대하는 사람이 이를 숙지하고 있으므로 이 단계는 건너뛰게 된다. 델비스코는 “무엇이든 고객의 취향에 따라 골라야 하므로 조합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는 가짓수가 수만 가지는 될 것”이라면서 “수만 가지 선택지를 펼쳐놓고 고객에게 무작정 ‘고르라’고 하면 안 되고 선택 가짓수를 좁혀 가며 수월하게 결정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MTM 전문가의 역할”이라고 했다.

550가지 원단으로 만드는 ‘제냐 MTM’

제냐 MTM은 기본적으로 크게 세 가지 스타일을 550여 가지 원단으로 만들 수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 지역 슈트를 기본으로 한 말끔한 스타일, 나폴리 지역 성향을 반영한 과감하고 유쾌한 분위기의 슈트, 정통 정장 모양새 등 세 가지다. 그렇게 나눠진 스타일을 놓고 재킷 앞여밈 단추의 개수, 재킷 깃인 ‘라펠’의 길이와 크기, 재킷 앞 주머니 모양 등에 따라 다른 세부 스타일을 결정한다. 이런 모든 조합을 고려하면 100가지가 넘는 스타일로 MTM 슈트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고객 정보·특성 파악이 끝나면 원단을 고르는 것으로 본격적인 MTM 서비스 상담 과정이 시작됐다. 원단은 비슷한 재질이라 해도 보일 듯 말듯 짜임새가 다르거나 미묘한 무늬가 섞여 있는 것 등으로 고르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델비스코가 추천 원단을 재빠르게 추려내 보여주고 원단 특성을 줄줄 꿰고 있는 덕에 그의 말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선택이 한결 쉬워졌다. 원단을 고르고 나선 스타일을 정해야 했다. “제냐에서만 제공하는 MTM 서비스”라는 소개와 함께 델비스코가 아이패드를 들고 나타났다. 화면에 고객이 선택한 재질과 스타일로 된 슈트를 입은 모델이 등장했다. 작은 원단 조각으로 볼 때와는 느낌이 달라 보였다. 마치 매장에 걸린 기성복을 보듯, 선택에 확신을 주는 도구였다. 스타일을 정하는 단계에서 델비스코는 “슈트 재킷에서 주머니의 개수나 위치를 달리하면 딱딱해 보이는 슈트 차림에 재미를 줄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런 설명을 들으며 재킷 주머니에 덮개를 달 것인지, 없앨 것인지, 오른쪽 주머니 위쪽에 작은 추가 주머니를 달 것인지 말 것인지 등도 취향에 따라 맞춤하는 것이 MTM 서비스였다.

3. MTM에 쓰이는 다양한 소재 견본을 손님에게 보여주고 있는 델비스코.

안감·단추 … 모든 소재 직접 선택 ‘나만의 옷’

MTM 서비스에서 치수를 재는 과정은 맞춤 양복점에서와 크게 다른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체촌 과정에서 느낄 수 없는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였다. 하체 사이즈를 잴 때는 허벅지의 굵기나 종아리의 길이 같은 기초 항목 외에도 엉덩이의 굴곡과 허리선의 편안함을 고려하며 모양을 잡아 나갔다. 세밀한 부분을 꼼꼼히 따져 가며 모양을 잡은 다음엔 전체 바지 모양이 재킷과 어울려 어떤 모양새로 떨어지는지를 확인하고 다시 고객에게 의견을 물었다. 바지 앞섶 쪽을 잴 때는 조심스러운 질문이 곁들여졌다. “대개의 고객은 바지 앞섶 모양이 자연스럽고 매끈하게 보이길 원하므로 제작 과정에서 이 부분을 신경 써서 마무리한다”고 했다. 격식 있는 자리에서 입는 슈트인 만큼 불필요하게 특정 신체 부위가 도드라져 보이는 건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란다.

이쯤이면 얼추 끝이 나려니 기대했지만 델비스코는 “MTM 서비스의 핵심, ‘나만의 옷’을 만들려면 아직 멀었다”고 한다. 단추의 재질을 정하고, 재킷 소매 단 단추를 장식으로 할지, 실제 풀고 잠글 수 있는 단춧구멍을 낼지를 결정해야 하며, 재킷 안감 무늬도 골라야 했다. 그는 “여름용 슈트에는 진주조개 껍데기로 만든 단추가 시원한 느낌을 준다”고 조언했다. 단추의 소재만 해도 20가지나 돼서 미리 골라 놓은 원단에 올려 가며 세심하게 고르는 과정이 이어졌다. 델비스코는 재킷 소매 단에 3~4개 다는 단추를 통해서도 고객의 취향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실용성을 우선시하거나 튀는 것을 꺼리는 고객은 장식용으로만 단추를 달게 하고, 슈트 입기를 즐기면서 MTM임을 은근히 내보이려는 고객들은 실제 기능이 있는 소매 단을 선택한다”는 거다. 슈트 재킷 소매 단은 기성복일 경우 거의 단추가 장식용으로만 달려 있어서 단추를 풀어도 소매 끝이 벌어지지 않는다. 슈트 제작이 기성화되면서 간편하게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바뀐 것이지만 MTM에선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이 가능해졌다.

슈트 재킷 안감을 고르는 과정은 MTM 슈트 상담의 대미와 같았다. “안감은 재킷을 여미고 단추를 잠그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입은 당사자, 혹은 입고 벗는 걸 볼 만큼 아주 가까운 사람은 안감이 어떤 것인지 안다. 기성복은 슈트 겉감과 비슷한 색상의 안감을 쓰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MTM을 즐기는 사람들은 현란한 무늬가 있는 안감, 겉감과 정반대로 화려한 색상으로 ‘나만의 옷’임을 즐기기도 한다.” 델비스코는 “단골 고객은 30분 만에, MTM이 처음인 고객은 한 시간도 넘게 상담한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파악된 정보는 즉시 이탈리아로 보내지고 통상 5주 뒤에 완성된 옷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글=강승민 기자
사진=에르메네질도 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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