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젠하워」특군의 서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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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며 전후에는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으로서 세계평화는 물론 한미간의 우의증진에 크게 공헌한「아이젠하워」전미국대통령이 29일 방년78세를 일기로 장서했다. 이비보가 전해지자 미국국민들을 비롯해서 세계가 다같이 그의 서거를 숙연히 애도하며 심심한 조의를 표명하고 있다.
그의 인생은 처음 군인으로 출발했다. 한때 그의 군인생활에 있어서는 불우한때도 있었다. 소령을 16년이나 한일도 있었다. 기껏해야 대령까지로 군대생활이 끝날것으로 본인도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과 더불어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인정되어 미육군사상 유례없는 진급을 했으며 군인으로서는 최고지위인 원수가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구주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서 마침내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오게한 영웅이 되었다. 전후 퇴역하여 한때「컬럼비아」대학총장에 취임했으나 다시 군무에 복귀하여 「나토」총사령관을 역임한일도 있다.
1953년에서 1960년에 이르기까지 8년동안 미국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정치생활에 있어서는 찬양과 비난의 양논이 엇갈린때도 있었다. 완강하고 극단적인 정책이라는 비평도 있었다. 그의 대외정책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덜레스」정책으로 요약되지만 그를 둘러싼 찬반양논은 잘 알려진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군인생활에 있어서나 정치생활에서 이룩한 역사적인 업적은 불후불멸의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있다. 지휘관으로서는 견실·귀임완수·공정·솔직, 그리고 정치가로서는 경륜과 지략, 그리고 원대한 세계도을 가지고 어려운 냉전시대에서는 이른바「롤백」(석권)정책의 주역을 맡으면서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특히「아이젠하워」대통령은 냉전시대또는 미·소양극시대에 있어서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팽창세력을 저지함에 노력했다. 냉전시대의 특징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집단적으로 대결했으며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세계가 양분되었다. 어느한편의 이익은 타방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손실로 간주되어 사사건건 생사에 관계되는 문제로서 격렬하게 대결했다.
이러한 시대에 대처하여「아이젠하워」대통령은 대량 보복정책을 비롯해서 1953년의 한·미방위조약, 1954년의 미·중방위조약, 1954년의 동남아조약등 집단안보체제를 확립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말썽많은 한국휴전을 이룩했지만 전후의 한국군강화및 한국복흥에대한 지원을 아끼지않았다. 특히 4·19이후의 1960년6월 그의한국방문은 한미수교사상 미국의 현직대통령이 처음 방한한것으로(1952년12월 대통령당선 직후 방한한 일이있음)한·미유대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한국의 친근한 벗이었다. 우리는「아이젠하워」재임시, 그가 베푼 한국에 대한 협조를 상기하면서 다시한번 그의 업적을 추모하고 그의 명복을 기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로서도 그장례와 애도에 응분의 조의표시가 있을것을 아울러 요망해 마지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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