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연구개발사업 새 잣대로 재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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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0면

정부가 운용해 온 국가 연구개발(R&D) 사업과 평가 시스템이 수술대에 오를 전망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최근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운용 실태를 점검하고 재평가한다는 방침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상황에 비춰 수술대를 비켜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방침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연구개발 예산을 최대 7%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공약을 실천하기 앞서 '새술'을 '새부대'에 담기 위한 전초전의 성격이 강하다.

'국민의 정부' 이후 연구개발비가 연간 총 예산의 4.7%로 5조원이 넘지만 사업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검증할 만한 객관적인 평가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 인수위 측의 판단이다.

또한 과학기술부.산업자원부.정보통신부 등 17개 부처가 경쟁적으로 1백여개의 연구개발 사업을 벌여 국민의 '혈세'가 중복 투자되고 비효율적으로 운용돼 왔다는 지적이 만만찮은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2001년 산자부가 유전자기술응용개발 프로젝트에 3조2천억원을 투입한데 이어 정통부가 유사한 생명공학(BT) 분야에 2조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부처간 지나친 경쟁은 결국 BT를 비롯, 정보통신(IT).나노기술(NT) 등 소위 '잘 나가는 분야'에 돈이 몰려 학문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초래한 원인이 됐다.

인수위 측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업평가를 위해 미국의 '메타평가 시스템'과 유럽연합(EU)의 '프레임워크 프로그램' 등 선진국의 평가관리 시스템을 도입키로 했다.

또 관련분야 외국인 전문가나 국내 연구계 인사들이 사업 평가에 참여토록 하는 '동료평가 시스템' 도입을 적극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각 부처의 연구개발 사업을 수시로 점검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고 중간 또는 사후평가 시스템을 대폭 강화할 방침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평가 시스템을 무작정 도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선진국은 평가 문화가 정착된 지 오래여서 관련 전문가를 선별, 평가 내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에 반해 국내 사정은 공정성 위주로 지연.학연 등이 없는 사람들만 평가자로 고르는 식이어서 때로는 평가할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평가자로 나서는 상황이라는 게 근본적인 차이다.

외국인이 국내 사업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봤지만 국내 사정에 익숙지 않고, 기술 유출의 우려도 있는 등 오히려 역효과를 냈던 전례도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민철구 박사는 "개별 프로젝트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국가발전단계 및 목표와 어떤 연관성을 맺는지 종합적인 사고의 틀 속에서 전략성을 따져봐야 할 때"라며 "이를 위해 과학기술 정책 조정역할을 맡는 대통령 직속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가 보다 능률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권한이 대폭 확대된 사무국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우리의 평가시스템이 지나치게 복잡하게 엉켜 있어 보다 정교하고 엄격한 체제로 바꿔보자는 것이 연구현장의 목소리다.

미국의 경우 소속기관에 의한 평가를 받은 뒤에는 소속기관이 상급기관의 평가를 대행, 연구자가 평가를 위해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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