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살린다는 크라우드펀딩, 미국선 검증 안 된 '모험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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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너스 펀(Magnus Fun)이 크라우드펀딩 중개사이트인 킥스타터에 일본 고베산 쇠고기(와규)로 육포를 만들겠다며 올린 홍보 글과 사진. 총 3252명이 12만309달러를 모았지만 사기로 밝혀져 모금이 중단됐다. [사진 킥스타터]

#인터넷 벤처기업 A사는 이달 초 크라우드펀딩(Crowd Funding) 중개사이트를 통해 주주 40여 명으로부터 1억여원의 투자금을 모았다. 중개사이트에 회원으로 등록한 개인투자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였다. A사 대표는 “창업 3년째를 맞아 영업 확대를 위한 돈이 필요했다”며 “여러 투자자의 자금을 받은 만큼 빨리 사업을 성공시켜 보답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든다”고 말했다.

 #미국의 대표적 크라우드펀딩 중개업체 킥스타터는 얼마 전 ‘와규 육포 사건’으로 구설에 올랐다. CNN머니에 따르면 ‘매그너스 펀(Magnus Fun)’이라는 회사가 세계 최고급 쇠고기인 일본산 ‘와규’로 육포를 생산하겠다며 킥스타터를 통해 한 달간 3252명으로부터 12만309달러(약 1억3500만원)를 모았다. 하지만 일부 네티즌이 생산 계획의 허점을 지적하자 회사는 계정을 삭제하고 자취를 감췄다. CNN머니는 “다행히도 펀딩한 돈이 은행 계좌로 넘어가기 전 적발됐지만 크라우드펀딩이 사기 위험이 크다는 걸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아이디어만으로 자금 모아 … 벤처엔 숨통

 벤처기업이 인터넷을 통해 네티즌으로부터 십시일반 돈을 모아 투자금으로 쓰는 펀드. 정부가 이런 개념의 크라우드펀딩을 창조금융의 핵심 수단으로 내년부터 도입하기로 해 논란이 예상된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벤처기업들은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다”며 환영하지만 “정부가 원금 손실 가능성이 큰 벤처 투자를 개인투자자에게 독려하는 건 위험한 발상”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정부가 크라우드펀딩 도입을 추진한 것은 지난해 5월부터다. 지난해 4월 벤처 활성화를 위해 크라우드펀딩 공모를 허용하는 ‘잡스법(Jumpstart Our Business Startups Act)’을 만든 미국을 벤치마킹하자는 취지였다. 대선 과정에서 ‘창조경제’를 화두로 내걸었던 박근혜정부가 출범과 함께 국정과제에 크라우드펀딩을 포함시키면서 제도 도입은 한층 탄력을 받았다. 정부는 연말까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통과시킨 뒤 내년부터 제도를 본격 도입할 계획이다.

 구체적으론 인터넷을 통해 벤처기업이 아이디어를 공개한 뒤 증권·채권을 발행해 주주 또는 투자자를 공모(공개 모집)하는 지분형 크라우드펀딩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개인투자자 1인당 투자 한도는 1건당 500만원(연간 1000만원), 기업의 투자 모금액 한도는 1건당 10억원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투자자 49인 이하의 사모펀드 형태 모집만 가능하지만 공모 형태의 펀딩이 시행되면 수백·수천 명의 투자를 받을 수 있다. 벤처업계에서는 크라우드펀딩 수요 기업을 1만여 개로 추정하고 있다. 투자자는 1년 이상 투자한 뒤 장외 주식시장에서 증권이나 채권을 팔 수 있는 구조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연구개발비가 없거나 고금리 대출에 의존하는 초기 벤처기업들의 자금난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관련법 만들고도 아직 시행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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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순기능보다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정부가 도입하려는 지분형 크라우드펀딩은 태동지인 미국에서조차 ‘정치적 실험’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검증되지 않은 투자 방식으로 지적된다. 미국도 증권거래위원회(SEC)에서 투자자 보호 문제 등으로 세부 시행규칙을 놓고 논의가 진전되지 않아 잡스법이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중은행의 여신 담당자는 “생소한 투자 방식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제도가 정착된 다음에 국내에 도입해도 늦지 않다”며 “정부가 창조경제 성과물을 내기 위해 너무 서두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크라우드펀딩의 탄생 과정도 투자와는 거리가 있다. 1997년 영국의 록그룹밴드 ‘매릴리언’이 미국 순회공연을 위해 팬들로부터 6만 달러를 모금한 것이 처음으로 알려져 있다. 팬들이 낸 후원금으로 밴드가 공연을 준비하고, 팬들에겐 공연표로 보답하는 후원형 모금이었다.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대가 없이 지원하는 기부형과 대부업체 융자와 비슷한 대출형 크라우드펀딩 시장이 생겨났다. 크라우드펀딩의 상업적 성공 사례로 꼽히는 ‘아이와치(아이팟 나노 손목시계) 프로젝트’도 후원형이었다. 지분형은 2010년 본격적으로 등장했지만 아직 규모가 크지 않다. 미국의 시장조사 회사 ‘매졸루션’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의 지분형 크라우드펀딩 금액은 3억8330만 달러로 전체(26억6040만 달러)의 14%를 차지한다.

“정부가 개인에 투자 리스크 떠넘기는 셈”

 정부가 벤처 투자 리스크를 아무런 보장 없이 개인에게 떠넘긴다는 지적도 있다. 코스닥시장조차 ‘정치 테마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 비상장 초기 기업에 개인 투자를 허용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빈(경영학) 한양대 교수은 “실적도 없는 기업의 아이디어만 보고 개인들에게 투자하라는 건 ‘묻지마 투자’나 다름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 증권사의 중소기업 담당 애널리스트는 “벤처기업의 80~90%가 창업 3년 내에 망하기 때문에 크라우드펀딩은 10%의 성공 가능성만 있는 레몬마켓(저질시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며 “초기에는 전문 에인절투자자만 참여시킨 뒤 차츰 투자자 참여 범위를 넓히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투자자 보호도 한계가 있다. 투자금을 1인당 연간 1000만원 이하로 제한하지만 주식 발행 1년 뒤에는 장외 유통시장에서 금액 제한 없이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장외 테마주가 양산될 거란 우려도 나온다. ‘먹튀’ 가능성도 제기된다. CNN머니의 조사 결과 지난해 킥스타터에서 크라우드펀딩을 시도한 프로젝트의 84%가 약속한 사업 일정을 지키지 못했다.

금융위 “사업 진위, 네티즌 집단지성 믿어”

 이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사업의 진위는 네티즌의 집단지성으로 판가름할 수 있다”며 “향후 시행 과정에서 투자자 보호를 위해 투자 한도를 더 낮추고 공모금액이 큰 기업에는 공시(사업설명) 의무를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입법 과정도 오락가락하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중소기업청이 주도권을 다투며 추진력이 분산됐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는 두 개의 크라우드펀딩 법안이 제출돼 서로 조율되지 않고 있다. 정무위 소속 신동우(새누리당) 의원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금융위원회, 산업통상자원위 소속 전하진(새누리당) 의원의 중소기업 창업지원법 개정안은 중소기업청이 각각 주무부처다. 신동우 의원 안은 개인의 투자 한도와 기업의 공시의무를 명확히 규정한 반면 전하진 의원 안은 투자 한도나 공시의무를 명시하지 않아 보다 자율성을 부여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위와 중소기업청이 모두 올해 청와대 업무보고에 크라우드펀딩을 주요 안건으로 넣었다”며 “결국 정부 부처는 물론 보고받은 청와대도 크라우드펀딩에 대해 제대로 된 사전 의견 교환을 하지 않은 채 국정과제로 넣고 법안을 추진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잡스법(JOBS Act·Jumpstart Our Business Startups Act) 지난해 4월 제정된 미국의 크라우드펀딩 법안. 벤처 활성화와 투자자 보호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벤처기업은 증권신고서를 제출하지 않고도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연간 최대 100만 달러(약 11억원)의 자금을 모을 수 있다. 투자금액은 연소득 10만 달러 미만은 최대 2000달러, 10만 달러 이상은 최대 10만 달러 범위 내에서 소득에 따라 차등화했다.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가 시행규칙을 마련하는 단계여서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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