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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미의 「파키스탄」|이코너미스트=독점전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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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유브·칸」정부는 체포한 정치범 1백41명의 석방을 발표함으로써 17일에 예정된 여야 협상에서 어떤 정치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아직 심각하며 반정부 「데모」는 정부의 무마책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다. 「이코너미스트」(2월1일∼7일호)와 UPI 통신은 「파키스탄」의 현 정치 위기와 스튜던트 파워를 다음과 같이 분석 전망하고 있다.

<정치적 위기|야당연합, 대통령 선거|군서 반 야유브·칸 거사 위험도-야유브·칸>
정월은 「야유브·칸」대통령에게는 운이 좋았으나 이 달이 끝나면서 그는 10년 전 대의정부를 내쫓고 정권을 빼앗은 이후 그의 권력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을 받고 있다. 2월 중순까지 「파키스탄」 전국주요도시에서 6일 동안 계속된 폭동으로 경찰이나 군인들에 의해, 피살된 시민의 수는 30명에 달했고 그밖에 l천여명이 체포됐다.
새해 접어들면서부터 「야유브·칸」 대통령은 영연방 수뇌회의에 참석하는 것보다 국내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지만, 모든 사태는 그의 뜻대로 될 것 같았다.

<부토 옥중출마 선언>
작년 11월과12월초에 있었던 정치파동은 가라앉아 있었고 정적들이 군과 야합하려는 계획은 명백히 실현불능에 가까왔다.
11월의 정치파동이 시작된 후 곧 체포된 전외상 「Z·A·부토」는 옥중에서 다음 겨울철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을 발표했다.
1월7일에는 구 정치인들의 집단체인 야당통일전선은 대통령 선거를 「포이코트」하기로 결정했다. 새로 등장한 「야유브·칸」의 정적인 전 공군참모총장 「아스가르·칸」중장과 전 동부 「파키스탄」법상 「S·M·머쉐드」씨 등은. 중부의 어느 곳에 숨어서 기침도 크게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부토」전 외상의 과격한 태도와, 그리고 그 야망은 전형적 정치인들에 대해서. 동등한 의심을 품게 했다. 한편동부 「파키스탄」의 저명한 정치인의 한 사람이며 「파키스탄」은 공산당이 되어야 한다는 노선에 가장 가까운 당에 소속한 연로한 정객 「마을라나·바샤니」는 통일전선을 거부했다.
그리고 통일전선 측에서 정치적 자유의 회복을 요구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는 「바샤니」는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한편 다른 후보의 자리를 빼앗기기 위해 출마하려는 한낱 군인으로밖에 여기지 않고 있는 「아스가르·칸」장군을 솔직히 의심했다.

<시민들에 발포까지>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그는 다음 번 대통령은 동부 파키스탄에서 뽑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렇게 되면 「부토」저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1월17일에 이르러 경찰은 동부 「파키스탄」의 「다카」에서 일어났던 「데모」를 종전과 같은 곤봉이 아닌 최루탄으로 쉽게 진압했다. 20일에는 「데모」대에 총질하여 1명을 죽이고 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24일 항의 「데모」는 그 속편이었다. 항의 「데모」의 첫날이었던 이날 총파업으로 전시가 완전 마비된 「다카」시에 육군이 투입되었다. 모든 학교는 폐쇄됐고 항공·철도는 운행 중지됐고 2개의 신문사는 방화로 피해를 입었으며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 4명, 부상 15명이란 소람이 벌어졌다.

<카라치선 10명 피살>
1주일 동안에 4명이 피살됐다. 그리고 「라호레」와 육군이 투입된 「카라치」에서는 1월27일 하룻동안에 최소 10명이 피살되었다. 서부 「파키스탄」에서는 27일 지사가 폭력의 종식을 호소하면서 정부는 모든 슬픈 사태를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대학생들의 정치활동을 억제한 1960연의 대학령이 이미 휴지 화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유브·칸」 대통령에게는 아직도 승산이 남아있다. 그리고 무력도 그의 편에 놓여있다. 물론 얼마간의 육군 장교들이 「야유브·칸」이 1958연에 저지른 것처럼 어떤 점에 관한 결정을 내릴 위험도 다분히 있다. 그렇지만 「아유브·칸」이 전에 수년 동안 지휘했던 군의 통수권을 잃지 않고 있으며 야당지도자들도 현 정국을 그들이 원치 않는 자가 「야유브·칸」에게 대치될지도 모를 사태에까지 몰고 가기를 바라지 않고 있다.

<스튜던트·파워|장기집권 항쟁의 주역으로|야당인사 구속되자 서로 규합-부토 부통령>
최근 1, 2년간 세계 각지에 마치 열병처럼 니 2년간 세자각지에 마치 열병처럼 만연되고있는 이른바 「스튜던트·파워」의 물결이 지금 「파키스탄」을 휩쓸고 있어 이 나라 정부를 최대 정치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스튜던트·파워」의 파동은 이 나라의 모든 교육기관을 완전 마비시켰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반정부 폭동으로 발전되어 「야유브·칸」대통령 하의 현 정부를 붕괴 직전에 몰아넣고 있다.

<학원 자유제한 발발>
1956년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한 「파키스탄」이 이같은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은 작년 11월 현 정부가 학원의 자유를 제한하는 내용의 신교육법을 실시하려 하자 학생들이 이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데서 발단되었다.
학원의 자유화, 등록금리 인하, 입학제한 완화 등을 내건 순수한 학생들의 데모에 대해 정부가 지나친 강압책을 쓰게 되어 쌍방에 사상자가 생기게 되자 피를 본 학생들은 극도로 흥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데모」가 더욱 가열화 하여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더우기 정부가 학생 「데모」를 선동하고 반정부 음모에 가담했다는 구실로 야당인 인민당의 「알리·부토」당수를 구속하자는 건의는 극도로 악화되고 8개 야당 전체가 일제히 학생 편에 가담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아유브·칸」정권타도』라는 반정부 운동으로 그 양상을 바꾸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학생 「데모」가 한창이던 작년11월 친 「부토」세력의 중심지인 「페샤워르」에서 「야유브·칸」 대통령에 대한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하여 정부는 학생과 야당활동에 더욱 강경책을 쓰게 됐다.
그러나 현 사태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독재와 부정부원의 온상이 돼버린 현 정권에 대한 그 국민들의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1958년 당시 부원하고 무능한 「말리크·피로즈·칸·눈」 정권이 오랜 정치불안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자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던 「야유브·칸」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었다. 일단 「쿠데타」에 성공하자 그는 부정부원을 일소하고 과감한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처음에는 국민들의 신임을 받았다.

<국민들의 불만 폭발>
그러나 집권이 장기화하고 「기본민주주의」라는 다분히 독재성을 내포한 새로운 정치형태를 도입함으로써 차츰 국민들의 신임을 잃게되었고 여기에 경제정책마저 실원하게 되어 언론을 탄압하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등 점점 독재화의 길을 걷게되었다.
순수한 학원 문제로 야기된, 금번사태에 학생·야당은 물론 의사·변호사·언론인 및 회교지도자까지 가담했고 전국의 노조까지 가세할 기미를 보이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야유브·칸」대통령은 야당과의 정치협상을 위해 오는 17일부터 개헌 등 여러 문제를 토의하자고 제안했다.

<언론탄압 완화 요구>
이에 대해 야당은 모든 정치범의 석방과 언론제한의 완화를 요구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한편 학생들은 또 그들대로 학원의 자유와 구동학생의 석방 및 정부·야당시국수습회의에 학생대표도 참가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 정부가 이 모든 요구조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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