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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후손, 닭의 자존심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여기 티라노사우루스가 있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서자 아빠는 마치 아들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대뜸 이렇게 말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초등학교 1~2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들의 눈은 아빠에 대한 존경심으로 빛난다. ‘와, 우리 아빠가 티라노사우루스도 아시다니…. 우리 아빠는 정말 멋진 분이야.’ 하지만 30초도 안 되어 실망의 탄식이 들린다. 아이는 공룡 밑에 있는 이름 팻말을 봤다. “아빠, 티라노사우루스가 아니라 아크로칸토사우루스인데.”

 아빠의 눈에는 험악하게 생긴 모든 수각류 공룡은 티라노사우루스로 보인다. 왜냐하면 티라노사우루스가 나오는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겐 티라노사우루스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룡’에 ‘점박이’란 이름으로 등장한 타르보사우루스도 익숙한 공룡이다.

 ‘쥬라기 공원’을 볼 때 우리 뇌에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공룡은 크고 포악한 티라노사우루스가 아니라 길이가 1.8m로 작지만 재빠른 벨로시랍토르이다.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공룡에 대한 설명을 하다 보면 어른이나 아이나 반드시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공룡은 왜 멸종했어요?” 거의 모든 사람은 공룡이 왜 생겨나게 됐는지 아니면 공룡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공룡의 멸종을 묻는다. 아마도 이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는 질문자의 어깨를 세워주는 요령이 필요하다.

 나는 공룡이 멸종하게 된 온갖 이유를 댄다. 질병, 허리디스크, 식중독, 곰팡이 침입, 초신성이 방출한 방사선, 알을 먹는 포유류, 태양 흑점, 외계인, 너무 작은 노아의 방주…. 결국 기다리다 지친 관람객은 먼저 6500만 년 전 뜬금없이 거대한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였고, 이어서 화산과 지진이 발생하고 그 결과 엄청난 기후변화가 일어나서 거대한 파충류들이 전멸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공룡의 멸종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첫째, 공룡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았다. 우리는 절제하지 못하고 몸집을 키운 공룡이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 멸종했다고 말하지만, 공룡은 그야말로 생명의 위대한 성공담의 주인공이다. 공룡은 1억6000만 년 동안이나 육상에서 지배적인 대형동물의 지위를 누렸다. 불과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탈출한 인간들이 공룡의 실패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둘째, 모든 공룡이 동시에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생명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한 종이 사라지면 그 자리를 다른 종이 채운다. 중생대 백악기 막바지에 살고 있던 공룡은 전체 공룡 종수의 1%도 안 된다. 다만 이번에는 사라지는 공룡을 대체할 새로운 공룡이 없었을 뿐이다.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뜬금없이 다가온 소행성을 어떻게 하겠는가?

 셋째, 공룡은 6500만 년 전에 멸종하지 않았다. 공룡은 새로 살아남았다. 우리가 키우는 닭은 살아 있는 공룡이다.

 이스라엘 헤브류대학 교정의 한쪽 구석에는 새가 공룡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닭들이 돌아다닌다. 일명 ‘누드 닭’이다. 도축과 가공하기 쉽게 아예 깃털을 없앤 극단적으로 품종을 개량(?)한 닭이다. 공룡은 오랜 시간을 거친 후에야 깃털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인간은 얼마 되지 않은 육종 기술로 깃털을 없애버린 것이다.

 누드 닭들의 운명을 상상해 보자. 털이 없으니 춥다. 체온을 유지해야 하니 엄청나게 빨리 많이 먹어야 한다. 덕분에 살도 금방 찐다.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높이려고 만든 누드 닭을 환경이 좋은 야외에서 키울 리는 없다. 투자비를 건지기 위해서라도 조밀한 닭장에서 사육할 것이다. 병아리 단계에서 부리가 뭉툭하게 잘렸겠지만 스트레스가 쌓인 닭들은 서로 쫀다. 상처 난 피부를 통해 온갖 균들이 감염될 것이고, 이것은 위대한 항생제 투약으로 극복한다.

 언젠가는 누드 닭들이 수퍼마켓에 진열될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처음부터 누드 닭으로 태어났는지 죽은 후 털이 뽑혔는지 구분할 수 없다.

 ‘쥬라기 공원’의 벨로시랍토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신들을 복제한 인간들에게 복수한다. 발톱과 깃털을 잃은 누드 닭은 몸에 축적된 항생제로 우리에게 복수할지 모르겠다. 닭은 살아 있는 공룡이다. 공룡을 사랑하는 아이들을 봐서라도 닭의 최후의 자존심인 깃털만은 지켜주자.



이정모 연세대 생화학과와 대학원 졸업. 독일 본대학에서 공부했으나 박사는 아니다. 안양대 교양학부 교수 역임. 『바이블 사이언스』 등을 썼다.